[글로벌 스탠더드 시대 ⑦]선진국 「환경장벽」

  • 입력 1998년 4월 22일 06시 33분


‘국경없는 자유무역의 수호자’인 세계무역기구(WTO)는 요즘 새우와 바다거북 때문에 괴롭다.

이른바 ‘슈림프&터틀(Shrimp&Turtle)’ 분쟁.

사건은 96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당시 한국 등 52개국이 잡은 새우는 사지 않겠다며 수입 금지조치를 내렸다.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바다거북에 대한 보호장비를 갖추지 않고 새우잡이를 했다는 이유. 미국내 환경론자들도 “새우잡이를 할 때 거북을 가려내는 장치를 한 그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세계적으로 연간 15만마리의 바다거북이 죽어 결국 멸종될 것”이라며 거들었다.

그러자 태국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3국은 미국의 수입금지 조치가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WTO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며 WTO에 제소했다. 이들은 “미국의 새우 수입금지조치는 환경을 빌미로 자국 기업을 보호하려는 환경제국주의적 음모”라며 “수입품인 새우만 멀쩡하면 됐지, 왜 바다거북을 끌어들이느냐”고 맞섰다.

WTO는 이 문제를 1년 넘게 끌어오다 6일 최종적으로 태국 등 제소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WTO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재판에서 진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새우 수입금지를 해제하기는커녕 항소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슈림프&터틀 분쟁은 선진국들이 환경문제와 관련해 높은 비관세 무역장벽을 쌓아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다. 미국 등 강대국이 자국의 환경관련 로컬 스탠더드를 다른 나라에도 강요하는 셈.

이런 미국 때문에 WTO는 ‘목에 가시가 걸려 있는’ 꼴이다. 상품과 서비스를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도록 각종 장벽을 허무는 일을 하는 WTO가 환경 장벽을 합리적으로 쌓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자유무역과 환경보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92년 리우 환경회담을 비롯한 국제 협상에서 ‘경제발전에도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긴 했으나 아직 선언적 단계. 게다가 선후진국간 경제수준이나 환경기술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합의된 규제기준이 많지 않다. 환경기술이 앞선 미국 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은 국제 표준이 나오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장사하고 싶으면 우리 기준을 따르라”면서 일방적인 규제 공세다.

미국은 멕시코와 베네수엘라에서 잡은 참치를 수입하지 않는다. 이들이 작업하는 동태평양 열대 수역에는 참치가 돌고래떼 아래에 살고 있어 참치를 잡다보면 애꿎은 돌고래도 함께 잡혀 죽는다는 이유다. ‘돌핀은 안전하다(Dolphin Safe)’는 표시가 있는 참치캔만 골라서 사먹는 소비자도 많다. EU 회원국에 세탁기를 팔려면 물이나 전기사용에 관한 EU환경기준을 통과했다는 ‘에너지 라벨’을 붙여야 한다. 또 7월부터는 EU가 지정한 환경친화적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수출은커녕 벌금을 내거나 형사처벌까지 받아야 할 지경이다.

정부규제만이 아니다. 환경마크가 없는 상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비자들과 흠집찾기에 열심인 환경단체들도 무역장벽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환경파괴적인 생산방식으로 제조된 상품이 들어오면 수출국 상품 전체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일 정도. 93년 미국의 환경단체들이 대만을 국제협약상 보호대상인 코뿔소 뿔의 최대 소비국으로 지목하고 대만산 운동화 테니스라켓 섬유제품 전자제품 등 전품목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인 것이 그 사례.

환경보호에 있어서 개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역시 이런 규제에 당하기일쑤다. 대한무역진흥공사국제경제부에는 선진국의 환경장벽에 부닥쳐 낭패를 본 경험담이 줄을 잇고 있다. 어떤 업체는 프랑스에서 컴퓨터모니터를 팔려고 했지만 재활용마크가 부착된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금도 못받았다.

“왜 남의 나라 기준을 따르라고 하느냐”며 억울해하는 개도국들에 선진국은 이렇게 대답한다.

“환경개선에 돈 한푼 안들이고 물건을 파는 것은‘환경덤핑(Eco―dumping)’이다. 우리와 공정한 경쟁을 하려면 그만큼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지구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예외가 있을 수 없지 않느냐.”

10여년간 각종 환경관련 국제통상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온 외교통상부 최석영(崔晳泳)환경과학과장은 “선진국이 환경규제 얘기만 꺼내면 거부감부터 앞세우는 한국 등 개도국의 피해의식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환경지출은 선진국의 무역규제를 피하기 위한 ‘비용’이 아니라 자국의 경제발전과 인류의 공생을 위한 ‘투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적.

삼성지구환경연구소 황진택(黃鎭澤)수석연구원은 세계 경제의 현실은 냉혹하다고 경고한다.

“2000년대의 새로운 통상질서를 결정할 밀레니엄(Millennium)라운드에서 환경분야는 선진국으로서는 걸고 넘어지기 딱 좋은 분야다. 환경에 투자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는 그들의 발톱에 아프게 차일 날이 올 것이다.”

〈이진영기자〉

▼글로벌 스탠더드 취재팀

△홍권희(경제부 차장·팀장) △천광암(경제부 기자) △박현진(〃) △박래정(정보산업부 기자) △이희성(〃) △이진영(사회부 기자) △유윤종(문화부 기자) △윤경은(생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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