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동포의 오늘②]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 입력 1998년 4월 8일 20시 11분


“아이고, 말도 말아요. 일본놈들이, 그 나쁜 놈들이 조선인 종자는 다 없애려고 했어요.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려요. 도망가려다 붙잡혀 몰살당한 사람들도 많아요. 그때 총맞고 겨우 살아난 사람도 내 이웃에 있다오.”

2월27일 취재진이 만난 박을금(朴乙金·82·여)씨는 입을 열기가 무섭게 일본에 대한 욕을 퍼부었다.

1m40쯤이나 될까. 초등학생만한 체구에 가냘픈 고령의 노파가 그토록 매섭게 일본의 잘못을 꾸짖는 게 놀라웠다.

충북 영동출신인 박씨는 23세 때인 1939년 사할린에 끌려왔다고 했다. 그해 정월 동갑내기였던 남편 민영선씨가 먼저 징용당한 뒤 섣달에 자신도 어린 자식 2명을 이끌고 온갖 고생을 하며 동토의 땅에 와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놈들이 남자들 도망 못가게 하려고 여자들까지 전부 끌고 왔어요. 그래 놓고 전쟁이 끝나자 자기들끼리 도망갔지. 할아버지(남편·82년 사망)는 너무 고향에 가고 싶어 목을 매 죽었어요. 돌아가기 전에 자신을 화장시켜 뼛가루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했다오. 죽은 다음에라도 물길을 따라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일본에 대한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라.”

홋카이도신문 이토(伊藤)기자에게 박씨의 말을 전달하던 통역은 박씨가 워낙 강하게 일본을 비난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통역을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통역도 당황한 듯했다. 이 때문에 기자는 박씨가 말한 내용을 나중에 이토기자에게 따로 설명해줘야 했다.

이토기자는 그 전날 취재한 한인단체 관계자들이 특별히 일본을 비난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일본에 대한 원망이 많이 엷어져 나중에 독자들이 재미 없어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기자에게 했었다.

박씨를 만나기 전 취재진이 방문했던 이종우(李鍾禹·86)씨도 “죽을 때까지 일본을 용서할 수 없다”며 노여움을 나타냈다.

이씨는 43년 5월 일본정부의 강제모집으로 사할린에 왔다. 당시 27세이었던 그는 고향인 경북 의성에 결혼 3년째인 아내와 세살 난 아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이들을 만날 염원으로 귀국을 기다리며 50세까지 혼자 살다 현재의 부인 김두리씨(72)와 재혼했다.

“탄광에서 일할 때 너무 배가 고팠어. 몸이 아파 병원에 가려 하면 욕만 먹었지. 일본사람들은 우릴 실컷 부려먹고 버렸어. 옛날 일 생각하면 정말 억울해. 이젠 이런 것 아는 사람들이 다 죽고 몇 안남았어. 일본이 아무리 배상한다고 해도 나는 안풀려.”

이씨는 처음엔 “일본사람들도 개인적으론 정이 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미워해도 사람들은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지난 일들을 회상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소련 시절엔 조선사람들은 귀국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사상문제로 걸릴까 봐. 생각해보면 몸과 마음이 모두 이곳에 억류됐던 셈이야.”

거실에서의 대화가 끝날 무렵 그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부인 김씨가 문간방에 홀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쇠약한 모습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김씨는 기자가 “빨리 건강을 회복해 한국을 방문하시기 바란다”고 인사하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답례했다.

“그래야 하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사할린은 너무 추워요. 따뜻한 데서, 죽을 땐 편히 죽고 싶어….”

3월1일. 기자는 이토기자와 아침식사를 하며 3·1절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기자가 3·1운동에 대해 설명해주자 그는 “일본에서도 역사는 가르치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기자는 다시 이날 오후 일본 도쿄(東京)에서 다이너스티컵 한일 축구전이 열리는데 한국사람들은 한국팀이 꼭 이기기를 바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토기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누가 어리석게 이런 날에 그런 경기를 잡았는지 모르겠다”며 “아마 모르고 경기일정을 잡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그러나 나중에 일본이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취재진은 이날 사할린의 주도(州都)인 유주노사할린스크 교외의 한 공동묘지를 찾았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고 올라간 언덕의 한쪽에는 한글 묘비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먼 이국땅에 끌려온 뒤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한인들. 찌푸린 하늘을 낮게 맴도는 까마귀떼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사진이 박힌 묘비를 일본기자와 돌아보는 심정은 한없이 착잡했다.

그날 밤 만난 김진환(金鎭還·60)씨는 그렇게 죽어간 한인들의 유해를 화장해 한국으로 봉환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징용 1세들 중 자신들의 유해라도 고국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분들이 수천명이나 됩니다. 저는 그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후손들과 협의해 유골을 한국에 있는 망향의 동산이나 선산으로 보내는 일을 10년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한인 2세인 그는 70년 1월에 사망한 선친의 유골을 언젠가는 고향인 경북 울진에 모실 생각으로 7년간 보관하다 도무지 고향방문의 길이 보이지 않아 결국 77년 8월 바다에 재를 뿌렸다며 애통해했다.

“올해도 정월 이후에만 얼어붙은 바다를 깨고 다섯 분의 재를 물에 띄웠습니다. 그럴 때 느끼는 비통함은 말도 못해요.”

그는 그러나 “이제 5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더이상 일본을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랬다. 취재진이 만난 상당수의 한인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일본에 대해 여전히 분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식적으로 쓰라린 과거를 잊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44년에 징용왔다는 한 노인(75)은 “세월이 흐르다보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많이 엷어졌다”며 “나처럼 약한 사람이 감정을 갖고 개인적인 원수를 갚아봤자 소용없는 일이고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 좋게 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노인회의 임판개(林判介·72)부회장은 “그 시절이 지나갔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며 “일본이 한 짓은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한기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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