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용정/도덕적 해이가 문제다

  • 입력 1998년 4월 6일 19시 59분


“오늘의 경제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우리경제가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가 솔직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뼈를 깎는 개혁만이 살길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전임자로부터 텅빈 국고와 엄청난 빚더미만을 물려받은 에르네스토 세디요 멕시코대통령의 대(對)국민 호소였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구제금융을 받은지 두달째인 95년4월 부도위기의 멕시코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대책을 내놓으면서 그는 국민에게 내핍과 고통분담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멕시코인들은 고실업 고물가 고세금의 질곡 속에서 자신들이 쌓아올린 실물자산 가치와 경제적 축적들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기업의 연쇄도산과 대량실업의 고통도 감내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비꼬았듯 ‘과잉살륙의 경제학’으로 일컬어지는 IMF처방의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세디요정부 또한 각종 개혁정책을 강도높게 추진했다. 긴축과 저성장의 단기적 고통을 감수하면서 산업구조와 금융시스템을 뜯어고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를 통해 장기적 발전 전략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그것은 결코 국민에게 인기 있는 정책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디요대통령은 고통분담이라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냈고 멕시코인의 저력을 한데 뭉쳐 분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에게 거는 국민적 기대나 강력하고 과감한 결단만으로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국민에게 비전과 꿈을 주었다.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한 전략과 정책과제, 실천프로그램을 투명하게 제시했다. 국민이 감당해야 할 땀과 눈물과 고통도 꾸밈없이 설명했다. 당면한 위기가 한 계층이나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시켰다. 이제 멕시코 경제는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IMF체제 넉달째인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국가부도위기를 가까스로 넘겼을 뿐이다. 일본의 금융불안은 제2의 환란(換亂)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사회 곳곳에서는 IMF체제쯤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도덕적 해이(解弛)가 폭넓게 번져나가고 있다. 정치권의 이전투구, 정책당국의 한건주의, 만연된 부처이기주의, 기업주의 고의부도, 지도층의 환투기, 공직자들의 책임회피 등이 국민을 허탈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각종 개혁도 방향타를 잃고 혼선을 빚고 있다. 이쯤되면 국난극복의 필수적 요소인 사회적 신뢰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우리에겐 지금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다. 세계적 컨설팅회사인 매킨지는 ‘한국재창조’ 보고서에서 우리에게 세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과거로의 회귀, IMF개혁프로그램의 준수 그리고 IMF를 뛰어넘는 능동적인 개혁이 그것이다. 그러나 과거로의 회귀나 IMF개혁프로그램은 대안이 될 수 없다. IMF식 처방은 한국경제회생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한국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길은 금융 및 제조업은 물론 우리의 의식과 제도 관행까지를 포함한 전면적이고 철저한 개혁밖에 없다.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기본원리와 시스템의 총체적 개혁을 통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먼저 그같은 시스템을 갖춘 나라의 간섭과 영향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전적으로 우리손에 달렸다. 지금처럼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서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김용정<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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