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남북대화 조급증

  • 입력 1998년 3월 19일 20시 09분


제네바 4자회담에 참석중인 우리측 대표가 북한측이 마치 ‘남북대화 용의’를 표명한 것처럼 서울에 보고하고 대통령이 논평까지 한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벌어졌다. 북한측 발언이 무슨 뜻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현지 외교관도 그렇고 잘못 파악한 내용을 국무회의에서 덜렁 보고한 장관도 그렇다. 모두 한건주의식 공명심에 들떠있기는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런 촌극이 일어난 것은 한마디로 대북(對北)정책의 조기 성과에 집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측이 설령 대화제의를 수용했다 해도 왜 그 자리에서 그런 언급을 했는지 먼저 배경과 이유를 따졌어야 했다. 더구나 문제의 발언을 했다는 이근(李根) 북한측차석대표는 남북대화문제를 직접 언급할 수 있는 부서의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같은 북한측 중간간부가 4자회담 전략을 탐색하기 위해 가볍게 던진 얘기를 경솔하게 확대 해석해 결국 대통령까지 망신스럽게 만들었다.

대북관련 부처의 고질적인 이기주의도 문제다. 외교통상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까지도 주무부처인 통일부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측은 국무회의에 보고하기 전에 당연히 통일부와 사전 검증, 확인절차를 밟아야 했다.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하는 것이 무슨 큰 공인 것처럼 부처간에 정보를 놓고 다투는 행태는 지양되어야 한다. 이래서는 국제경쟁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남북한 문제는 서두른다고 빨리 해결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북한이 등을 돌리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만사가 헛일이다. 김영삼(金泳三)정부 초기에도 우리는 그같은 남북관계의 현실을 실감했다.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한에 보내는 등 갖가지 유화정책을 취했다. ‘햇볕론 정책’을 펴면 북한이 개방 개혁을 하고 남북대화에 응할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남북한 관계에는 단 한치도 진전이 없었다.

새 정부 들어서도 그때와 같은 양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 추진, 특사교환, 대규모 영농지원, 민간단체의 대북지원 활성화, 방북(訪北) 신고제, 북한 TV 라디오개방 등 획기적인 대북제의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다. 북한의 반응이나 실천가능성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다. 우리가 진심을 보이고 성의있는 제의를 하면 북한도 결국 호응해올 것이라는 판단인 것 같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과거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없다. 일방적으로 남북대화에 집착하다가 오히려 역이용당할 우려가 있다. 대북관계는 무엇보다 원칙에 따라 인내를 갖고 신중히 추진해야 한다. 조급증은 절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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