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007 네버다이」,미디어제국 음모 파괴

  • 입력 1998년 1월 4일 20시 29분


우디 앨런 영화 ‘라디오 듣던 시절’속의 한토막. 결혼에 안달이 난 노처녀가 데이트하던 중 라디오에서 ‘화성인 침공’얘기가 흘러나온다. 여자를 팽개치고 내빼버리는 남자. 노엽고도 황당해진 여자. 실제 오슨 웰스가 만든 라디오극 ‘화성인 침공’은 현장중계처럼 진행돼 미국인들의 피난 트럭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17일 개봉을 앞둔 ‘007’ 18탄 ‘네버 다이’는 미디어의 위력이 막강할대로 막강해진 현실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다. 원제 ‘내일은 죽지 않는다(Tomorrow Never Dies)’의 ‘내일(Tomorrow)’이란 극중 미디어제국 총수 엘리엇 카버가 주무르는 일간지의 제호다. 제임스 본드가 지금까지 상대해온 소련제국과 핵테러리스트들은 이제 더이상 현실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 미디어 제왕 카버는 이 상황에서 새롭게 탄생한 ‘신선한 적(敵)’인 것. 시드니 루멧의 현실적인 드라마 ‘네트워크’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이 생방송될 것임을 예고하는 기자를 다뤘다면 ‘네버 다이’는 미디어제국이 천년융성을 위해 전쟁을 도발한다는 ‘007’다운 설정 위에 서있다. 카버는 레이더망을 교란시켜 영국 구축함을 중국 영해로 유인하고 중국 전투기가 출동하게끔 만든다. 잠복중이던 자신의 잠수함이 양측을 파괴하는 것은 정보기관도 파악하지 못한 세계적 특종을 타전하기 위해서다. ‘007’시리즈의 인기는 현실과 허구의 긴장이 일방적으로 무너진 지점에 놓여있다. 이 영화에 공식처럼 나오는 초고성능 방탄차와 최신식 소총에서부터 주인공 불멸의 신화, 선악대립의 우화는 허구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오락영화의 전형을 제시한다. 영국의 피어스 브로스넌이 본드로, 화교 양자경이 본드걸로 짝을 맞춘 것도 이같은 구도에서 나온다. 두 사람은 초대형 현수막을 찢어 내리면서 마천루 아래로 뛰어내리고, 오토바이로 지붕 위를 물 찬 제비처럼 달린다. 본드가 성층권에서 바닷속으로 맨몸 하강하자 본드걸은 벽을 거꾸로 타고 십수명의 장정들을 발끝으로 처리한다. ‘예스 마담’에서 온몸을 무기로 보여줬던 양자경은 역대 본드걸 가운데 가장 강한 여성인 셈이다. 작고한 ‘007’의 원작자 이안 플래밍은 영국 해군에서뿐만 아니라 로이터통신과 더 타임스에서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가 만일 ‘네버 다이’를 본다면 미디어의 무소불위에 대한 반성보다는 자기 피조물의 액션에 넋이 나갈 것이다. 〈권기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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