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10)

  • 입력 1997년 1월 10일 20시 24분


첫사랑〈10〉 여자 아이는 아마 한 시간 반쯤 욕실에 있었을 겁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거실 전화기의 자동응답 장치에 메시지 두 개가 입력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쪽의 자동응답 메시지가 나가자 그냥 수화기를 내려놓은 것이었고, 또 하나는 비너스 가슴 그림을 준 친구였습니다. 『여보세요. 서영이 집 맞지? 나 은지야. 서영이 너 지금 집에 있으면서 전화 안 받는 거지? 공부하는 것도 아닐 테고, 뭘 하느라고 전화도 안 받니? 밖에 나가 있으면 나중에 들어와 우리집으로 전화해야 돼. 끊어, 그럼』 거울 앞에서도 얼굴이 빨개졌는데, 밖에 나와서도 다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 친구는 선생님의 사진을 붙인 목걸이를 아직도 걸고 있습니다. 베란다로 나가 꼭꼭 닫아두었던 버티컬을 열어 젖힐 때, 까닭없이 세상에 대해 혼자 부끄러워지는 마음이었습니다. 나올 때에도 여러번 물을 끼얹고 수세미로 문지른 욕실 거울을 다시 들어가 확인했습니다. 혹시 거기에 아직도 내 모습이 엄마의 루주로 그린 가슴 그대로, 숲 그대로 남아 있지나 않은지. 욕실 거울엔 깨끗이 지워져 있어도 내 가슴 속 또 다른 거울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을 그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누가 물으면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열아홉 살 때, 여자 아이는 처음으로 그 아저씨에게 편지를 쓸 생각을 했습니다. 매주 화요일이면 아무도 모르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은밀하게 전해받은 연애편지를 읽듯 그렇게 열심히 읽고 오리고 모아온 「명작의 고향」이 일백이십회 연재로 끝을 냈습니다. 그때는 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을까요? 돌아보면 주간 연재로 일백이십회면 그것도 짧은 시간이 아닌데 말입니다. 중간중간 빠진 날까지 친다면 이년 반은 족히 걸렸을 시간 동안 여자 아이는 그 아저씨가 쓴 기사를 읽고, 하석윤이라는 그 아저씨의 이름을 가슴에 담고, 기사 속의 책을 읽어왔습니다. 어쩌면 그때까지 그 여자 아이의 가슴을 키워왔던 것의 팔할이 그 「명작의 고향」속에 나오는 「비극적이면서도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사랑」에 대한 그런 은밀한 호기심들이었는지 모르는데…. 아직 아저씨는 모르지만, 그 기사를 자신에게 쓴 연애편지처럼 열심히 읽고, 또 정성들여 스크랩하고 있는 여자 아이가 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잃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마음, 아저씨는 짐작도 못했겠지요. <글 : 이 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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