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40)

  • 입력 1996년 12월 11일 20시 16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14〉 겨울 해가 짧긴 한 모양이다. 채점을 끝마치기까지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책상에서 고개를 드니 방안이 꽤 어두워져 있다. 일어나서 불을 켤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의자에 깊숙이 앉아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고 창을 쳐다본다. 창밖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다. 추운 밤 나를 업고 골목길에서 『나는 날개를 달았다』고 외치던 종태. 하지만 그는 나와 같이 살면서 평생 업어주고 싶다고 속삭이는 한편으로 지금 아내가 된 그녀의 몸 속에 딸을 만들었다. 그가 자기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을 때 나는 나대로 그와 결혼할 결심을 거의 굳힌 무렵이었다. 일년이 넘도록 내게 청혼을 해왔으면서 결혼은 다른 여자와 한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이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방심을 얼마나 조소했는지 모른다. 결혼 후 다시 찾아왔을 때 나는 종태를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시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세 애인 중의 하나와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내 마음을 단속했다. 지금 그가 새 연애에 빠졌고 게다가 아내에게 발각되어 결과적으로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데 대해 큰 원망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덕분이다. 나는 누구도 나를 상처입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나 위악을 별러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위악으로부터 추락하고 있다. 어둠 저편에서 현석의 흰 얼굴이 애틋하게 떠오른다. 추락하는 자가 무엇을 붙들려고 하는가. 누군가가 절벽 위에 엎드려서 안타깝게 손을 내밀어주고 있지만 그 손을 잡으면 결국 함께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더구나 그 손은 사랑하는 사람의 순결한 손이다. 그 손을 추악한 동반으로 더럽히면서 함께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방안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나는 시체처럼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평화로운 마음으로 어둠을 맞아들인다. 눈을 감는다. 나는 높이 올라간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추락하고 있다.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린다. 『언니, 캄캄한데 불도 안 켜고 뭐해?』 애리의 목소리가 공명처럼 방안에 울려퍼진다. 그러고는 딸깍 하고 스위치 올리는 소리와 함께 방안이 환해진다. 나는 눈을 찡그린다. 망막 속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빛을 한껏 밀어내기 위해서. <글 : 은 희 경>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