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시류 거부한 「세기의 건축가」 가우디

  • 입력 1996년 10월 17일 10시 51분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유럽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나타난 모더니즘이 절정을 이 루던 시기다. 건축부문에서도 유려한 곡선장식의 아르누보에서 바우하우스 등 기능 과 실용을 중시하는 근대건축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때 안토니오 가우디는 시류와는 무관한 독창적인 양식의 건축을 창조했다. 그가 성장한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은 남프랑스의 고딕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슬람건축의 흔적도 남아있으며 바로크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서 다양한 문화들이 뒤섞여 있던 곳. 기름진 문화적 토양에서 성장한 가우디는 과거건축을 답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과거 건축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았다. 과거건축을 분석하고 그곳에서 얻은 영감을 통해 자신의 것을 새롭게 창조했던 것 이다. 그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에우세비오 구엘의 비센스주택으로 대표되는 초기 작품에 는 이슬람적 문화전통이 그대로 배어있다. 다양한 기하학적 패턴과 화려한 색채의 모자이크 타일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가우디는 고딕양식에도 영향을 받았으나 고딕건축의 상징인 버팀벽의 구조적 한계를 간파, 경사진 기둥을 가진 포물곡선으로 이를 극복하는 천재성을 함께 보여 줬다. 이후의 가우디 건축은 흔히 「유기적 건축」으로 불리는데 이는 자연에서 모티브 를 얻었을 뿐 아니라 건축물 구조도 나무 등 자연의 구조를 응용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대표작인 구엘공원과 카사밀라의 외관은 자연환경과 훌륭히 조화되고 건축내부의 장식 및 구조도 주변과 융화를 이루고 있다. 당시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근대건축의 주흐름은 기하학적인 도형 ‘색채의 단순 성’ 새로운 재료의 사용 등을 통해 공업화와 표준화를 추구했다. 가우디는 이와 전혀 상반된 입장을 견지, 근대의 산물인 철근콘크리트보다는 벽돌 을 좋아했으며 철(鐵)을 구조재가 아닌 장식재로 이용했다. 또 마감을 하지 않아 재료를 그대로 노출시켰으며 현란한 색채타일을 사용했다. 시대흐름에 역행하는 듯한 가우디의 건축이 모더니즘 시기에는 크게 각광받지 못 했으나 모더니즘이 팽개친 상징과 의미를 되살리고 지역의 풍토성을 중시하는 50년 대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시기로 넘어오면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고 60년대에 이 르러서는 「세기의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지역적인 건축이 가장 세계적인 건축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1883년이래 1백년이상 지속되어 온 성가족성당의 망치소리와 구도자 가우디의 건 축인생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번 전시회는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인 건물더미속에 파묻혀 잃어버렸던 감수성을 일깨우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김 진 균(서울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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