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소방관이 장애인 아시안게임에? [태극전사, 지에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7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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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에군(结棍)’은 중국 항저우 지역 방언으로 ‘대단하다’ ‘강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한국 선수단의 장애인 아시안게임 선전을 기원합니다.

강원 인제군 스피디움에서 열린 ‘투르 드 코리아(TDK) 2019 스페셜’ 제1 스테이지에서 우승을 차지한 윤중헌(왼쪽). 동아일보DB
강원 인제군 스피디움에서 열린 ‘투르 드 코리아(TDK) 2019 스페셜’ 제1 스테이지에서 우승을 차지한 윤중헌(왼쪽). 동아일보DB


마지막까지 누가 1위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레이스 후반부터 선수 5명이 무리를 이뤄 달렸기에 사진 정밀 판독으로나 순위를 가릴 수 있을 상황. 10m 정도를 남겨놓고 한 명이 튀어나왔다. 다른 선수들이 추월하려 애썼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마지막에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 선수는 그밖에 없었다. ‘마스터스 사이클의 왕자’가 돌아왔다. 윤중헌(28·팀 수티스미스펠트)이 27일 강원 인제군 스피디움에서 열린 ‘투르 드 코리아(TDK) 2019 스페셜’ 첫날 56분 29초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2019년 9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이렇게 등장했던 윤중헌은 전북장애인사이클연맹 소속으로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고 있는 장애인아시안게임에 출전 중이다. 그렇다고 4년 사이에 장애를 얻은 건 아니다. 윤중헌은 시각장애인 선수 김정빈(31·하이브시스템)과 짝을 이뤄 이번 대회 ‘탠덤 사이클’ 부문에 참가했다. 탠덤 사이클은 비장애인 ‘파일럿’이 앞에 시각장애인 선수가 뒤에 타는 2인승 자전거다.

트랙 위에서 탠덤 사이클을 타고 있는 윤중헌(왼쪽)과 김정빈.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김정빈-윤중헌 조는 대회 개막 이튿날인 23일 4000m 개인 추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번 대회 한국 선수단의 첫 금메달이었다. 이어 26일에는 18.5km 도로독주에서 두 번째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 한국 선수단의 첫 2관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대회 사이클 마지막 경주일인 27일 69km 개인도로에서 1시간35분27초로 우승하면서 한국 사이클 선수로는 처음으로 장애인 아시안게임 3관왕을 차지했다.

윤중헌은 “첫 번째 시상식 때는 벅차기만 했는데 세 번째 애국가를 들으니 훈련하며 고생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같이 땀 흘리며 고생한 정빈 님에게 고맙다. 저를 파일럿으로 선택해주시고 잊지 못할 경험을 만들어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장애인 아시안게임 사이클 3관왕을 차지한 김정빈(왼쪽)-윤중헌.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장애인 아시안게임 사이클 3관왕을 차지한 김정빈(왼쪽)-윤중헌.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윤중헌은 동호회 동료 박찬종(33)이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뒤 장애인 사이클 선수로 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탠덤 사이클 세계에 발을 들였다. 지난해 9월 왼쪽 다리를 절단한 뒤 장애인 전업 선수가 된 박찬종은 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 ‘재활 일기’를 남겨 사이클 동호인들 심금을 울린 인물이다. 윤중헌은 “(박)찬종이 형 소개로 정빈 님을 만났다”라며 “탠덤 사이클을 알게 된 뒤 ‘정말 아름다운 동행이구나’라고 느꼈다”라고 말했다.

윤중헌은 “(트랙보다) 도로는 변수가 많다. 짧은 코너가 있는가 하면 깊게 꺾이는 구간이 있고, 내리막에서 속도를 내거나 오르막에서 같이 댄싱(안장에서 일어나 페달을 밟는 것)을 해야 할 때도 있다”면서 “정빈 님이 몸으로 느끼기 전에 미리 인지할 수 있도록 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김정빈은 “저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윤중헌의 말을) 들으면서 탄다. 그렇게 서로 맞춘다”라고 했다.

윤중헌은 경기 남양주소방서에서 일하는 소방관이다. 원래는 자전거 숍 직원이었는데 “좀 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다”며 소방관이 됐다. 윤중헌은 장애인 국가대표가 되면서 비번인 날을 쪼개 훈련하고 공가를 내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윤중헌은 김정빈과 호흡을 맞춰 6월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 도로독주에서 우승하며 국제대회 금메달을 처음 따낸 뒤 이번 대회에서 한국 장애인 사이클 역사를 새로 썼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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