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장 알바하던 김세연, 걸레 대신 큐대 들고 정상에 섰다…“평생 당구와 함께”

강동웅 기자 입력 2021-03-12 14:26수정 2021-03-1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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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딸 같아서 그러지.”

2013년 서울 서초구의 한 당구장. 당구 동호회인 중장년 남성이 음료를 서빙하던 10대 여성 아르바이트생의 등을 쓰다듬으며 건넨 말이다. 매일 5시간씩 시급 5500원을 받으며 닉네임 ‘뽀로로’라 불리던 이 여성은 8년 뒤 여자프로당구(LPBA) 정상에 오른 김세연(26·TAS)이다. 그는 “여성 당구인이 많지 않던 시절 당구를 배우면서 몸을 함부로 만지며 성추행을 하거나 반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열심히 해서 유명해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김세연은 6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김가영을 물리치며 2020~2021시즌 LPBA 초대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키 158cm에 가녀린 몸, 양쪽 귀가 모두 보일 정도로 짧게 친 숏컷이 인상적인 그는 동안인 얼굴 덕분에 가끔 중학생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제 당구를 하는 그 어떤 선수나 동호인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LPBA 정상’의 위치에 올라섰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 당구대 닦는 ‘걸레’ 대신 ‘큐대’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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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인 18세 김세연은 말 그대로 ‘당알못(당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활동적인 성격으로 중고등학교 시절 남자 학생들과 어울려 축구공을 차며 지냈다. 편의점, 피자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2~3개월씩 하던 그는 “당구장 아르바이트가 편하다”라는 친구들 소개로 당구장을 찾았다. 매일 오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30번 넘게 테이블을 닦고, 음료를 서빙하고, 손님들 계산을 도왔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약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당구장을 찾은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공을 쳐볼 기회를 갖게 됐다. 관심을 갖고 배워보려는 모습이 기특했던 당구장 사장은 “부담없이 쳐보라”며 100만 원 상당의 개인 큐대를 빌려주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시작 한두시간 전부터 당구장에 나와 동호회 사람들과 공을 쳤다. 흠뻑 빠져 공을 치다가 이튿날 오전 5시에 아침 해가 뜨는 모습을 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당구는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몸을 많이 사용하는 활동적인 스포츠는 아니지만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는 “당구의 길은 무궁무진하다. 칠 때마다 1mm라도 다른 배치가 나와 초구 빼고는 항상 다른 위치에 있는 공을 칠 수 있어 늘 새롭다”며 “내가 의도했던대로 공이 맞아들어갈 때면 온 몸이 짜릿하다”고 말했다. 2017년 당구를 업으로 삼기로 결심하고, 다니던 대학을 중퇴한 뒤 선수 등록을 했다.

● 슬럼프 이겨낸 원동력은 ‘사랑’

프로의 길로 들어선 그는 얼마가지 않아 슬럼프에 빠졌다. 2019~2020시즌 PBA-LPBA 출범 직후 처음 열린 파나소닉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이후 대회에서 연거푸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1년 가량 본선 진출이 가로막히자 자신의 능력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어 당구를 포기하고 싶었다.

그를 붙잡아준 건 주위의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 수강료도 없이 그의 지도를 도맡아 온 사람은 김병호 프로. 같은 LPBA 동료인 김보미 선수의 부친이기도 해 줄곧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 한동안 부진한 모습을 보여온 그에게 김병호 프로는 “지금 급한 건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라며 “이미 지나간 실수를 더 이상 후회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조금은 진부했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이 한 마디는 그의 마음을 후벼팠다.

2020~2021시즌 첫 대회인 SK렌터카 챔피언십에서 그는 훨훨 날기 시작했다. 예선을 통과해 16강 본선 문턱을 넘어섰다. 두 달 뒤 열린 TS샴푸 챔피언십에서는 개인 통산 첫 LPBA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아니나 다를까 득점을 못해서 또 자책하려는 순간들이 있었다. 조언을 기억하면서 부담을 내려놓고 하니까 신기하게 공이 잘 맞아들어갔다”고 말했다.

● “내 인생, 당구와 평생을”
그는 자신이 본받고 닮아야 할 선수로 월드챔피언십 결승전 상대였던 김가영(38·신한금융투자)을 꼽았다. 김가영은 상금 랭킹 3위(3100만 원)로 1위인 그(1억2075만 원)보다 뒤져 있지만 대회마다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그는 “기복 없이 항상 좋은 모습을 보이는 김가영의 면모를 닮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당구인으로서 그는 목표가 있다. 좋은 성적을 내는 것뿐 아니라 당구에 대한 열정으로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선수가 되는 것이다. 그는 “저보다 나이 많은 선수뿐 아니라 저보다 어린 선수들에게도 당구에 대한 열정으로 존경을 받고 싶다. ‘저 선수는 정말 당구를 사랑하는구나’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구와 한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이다. 경쟁자인 동료 선수들이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월드챔피언십 결승전 직전 동료 김민아가 보낸 ‘준비됐지? 믿는다’라는 짤막한 문자는 아직도 그의 마음 속에서 잊히지 않고 있다. 절친 강지은과 ‘여제’ 이미래 등 동료도 ‘내 몫까지 해달라’며 힘을 보탰다.

그는 “동료들 입장에서 그저 부러워하기만 하고 나를 응원해주지 않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심으로 내 우승을 바라주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고마웠다”며 “난 정말 축복받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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