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왕년의 에이스’ 박명환 “야구계 후배들 일자리 창출 위해 뛴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1월 4일 07시 30분


박명환은 두산 베어스∼LG 트윈스∼NC 다이노스를 거치며 프로 통산 103승을 따낸 우투수다. 현역 시절 최고구속 150km대 빠른 공과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앞세워 손민한∼배영수와 함께 우완 트로이카로 불렸다. 스포츠동아DB
박명환은 두산 베어스∼LG 트윈스∼NC 다이노스를 거치며 프로 통산 103승을 따낸 우투수다. 현역 시절 최고구속 150km대 빠른 공과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앞세워 손민한∼배영수와 함께 우완 트로이카로 불렸다. 스포츠동아DB
우완 트로이카의 한 축, 슬라이더 달인.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박명환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2004시즌에는 평균자책점(2.50)과 삼진(162개) 부문 타이틀을 거머쥐며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우뚝섰다. 최고구속 150㎞대 초반의 빠른 공과 슬라이더의 두 가지 구종만으로도 상대 타자를 제압하기 충분했다.

우여곡절도 심했다. 2006시즌이 끝나고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어 LG 트윈스로 이적한 뒤부터 과거의 혹사 여파가 발목을 잡았다. 어깨 수술 대신 재활로만 10년을 버텼으니 성할 턱이 없었다. 2007년 10승을 거두며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2008년부터 2010년까지 LG에서 등판한 경기는 24게임이 전부였다. 이후 3시즌을 통째로 쉬고 NC에 입단해 감격의 승리를 따내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야구계 후배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배운 게 야구밖에 없으니, 그쪽에서 내가 보답할 게 무엇인지 찾고 있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스포츠동아와 인터뷰에 응한 박명환은 과거를 돌아보며 야구계의 현안을 지적했다.

-처음 야구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어린 시절 OB 베어스 팬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충남 금산, 어머니는 전북 진안이었는데, OB의 연고지가 충청도였다. 아버지께서 양복점을 하셨는데, 늘 TV로 프로야구 경기를 틀어놓으셨다. 나도 그렇게 야구를 접했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당시 옥정초등학교 육상부 멀리뛰기 선수였는데, 야구를 하고 싶어서 청구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배영수, 손민한과 함께 우완 트로이카로 불렸다. 그 평가와 다르게 시즌별 편차가 심했다.

“고교 시절 혹사 여파가 컸다. 프로 3년차에 어깨를 다쳤다. 꾸준히 180이닝씩 던졌는데, 한 시즌 잘하면 다음해 쉬는 패턴이 반복됐다. 팀의 에이스다 보니 계속 던져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당시에는 투구수 관리라는 개념이 없었다. 통증을 참고 던졌다.”

-박명환이 기억하는 입단 첫해는.


“통합우승 다음 해(1996년) 입단했는데, 주축 선수들의 부상이 이어졌다. 나는 어린 나이에 2~3선발을 꿰찼다. 김인식 감독님께서 좋은 기회를 주셨다. 전반기에 6승2패를 기록했는데, 중반 이후 개인 9연패를 당하기도 했다. 3개월 동안 승리를 못 챙겼고, 7승 12패로 시즌을 끝냈다(평균자책점 3.84). 그해 30홈런-30도루를 달성한 박재홍과 신인왕을 다퉜다.”

-10년간 두산에서 활약한 뒤 FA가 됐다. 해외 진출까지 고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FA 직전 시즌인 2006년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7이닝 동안 삼진 13개를 잡은 적이 있다. 그때 일본프로야구(NPB) 주니치 드래곤스 스카우트가 ‘어깨만 안 아프면 우리가 스카우트했을 것’이라고 했다. 어깨가 좋지 않아 일본 진출이 어려웠다. 계약조건이 5000~8000만엔에 1년 계약이었다. 한국에선 LG가 4년 40억원을 제시했고, 계약을 했다.”

박명환. 스포츠동아DB
박명환. 스포츠동아DB

-결국 LG 유니폼을 입게 됐다.

“결정적으로 두산은 베팅을 안 하면서 하는 척을 했다. 친정팀이고, 내가 계속 야구했던 팀이지만, 서운함은 없었다. 나는 상품이고, 그 상품이 좋지 않으면 안 사는 것이다. 선수의 상품가치가 떨어지면 다른 구단에 파는 것이다. 역대 프랜차이즈 선수들에게도 똑같이 대했다. 물론 내 몸 상태를 두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때 LG가 베팅을 했고,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산 팬들은 ‘같은 금액에 왜 가느냐’고 오해했지만, 실질적으론 아니었다. 두산은 금액 자체를 제시하지 않았다.”

-10승을 거둔 이적 첫해(2007년) 이후 LG에서 좋은 기억은 없다.

“어깨 수술이 문제였다. 참고 던졌어야 했다. 너무 아프니 7~8년간 참다가 수술이라는 큰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수술 후 트레이닝 파트에서 빠르게 재활을 진행하려 하다 보니 내전근이 찢어지고, 허리쪽에도 부상이 겹쳤다. 결국 재활만 7년 가까이 했다. 결국 내가 LG에 ‘풀어달라’고 한 것이다. 구속도 안 나오고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2013년에 NC 김경문 감독님께서 손을 잡아주셨다. ‘팀에 고참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불꽃을 태웠다.”

박명환. 스포츠동아DB
박명환. 스포츠동아DB

-NC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103승째를 따냈다.

“39세에 149km라는 구위를 찾았었다. 102승에서 103승으로 가기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 그때까지 투심패스트볼(투심), 컷패스트볼(커터), 스플리터 등 계속 연마했었다. 유희관(두산)처럼 살아남아야 했다. 강속구 투수에서 기교파로 변신하는 갈림길에서 스피드를 찾았다. 전성기 때는 ‘박명환 하면 직구와 슬라이더’였는데, 마지막 경기에서 모든 구종을 다 던져봤다는 게 뜻 깊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그 시간이 큰 자산이 됐다.”

-2016시즌이 끝나고 NC를 떠났다. 이후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

“성남 블루팬더스에서 1년 반 가량 코치로 경험을 쌓았고, 2018년 6월에 나와서 아카데미 사업을 시작했다. 엘리트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파주시에 있는 야구장 2개를 인수했다. 사회인야구와 독립야구단 후배들을 도와주려 한다, 자세히 알아보니 리틀리그는 활성화돼있는데, 어려운 친구들이 지방에 가서 경기를 하더라. 그렇게 되면 부모들도 경비를 많이 쓰게 된다. 그래서 직접 유소년 대회도 유치하고 싶다. 은퇴 후 1~2년을 살아보니 내가 배운 게 야구밖에 없더라. 야구를 통해 큰 사랑을 받았으니 후배들에게도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싶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득 수준도 높일 수 있도록 백방으로 뛰어야 한다.”

최근에는 독립야구단 창단을 준비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박명환
최근에는 독립야구단 창단을 준비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박명환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들었다.

“축구선수 출신 김병지, 송종국과 동영상 채널(유튜브)을 통해 방송을 하고 있다. 야구에만 국한하지 않고 축구와도 결합한 아이템을 찾고 있다. 독립리그도 키우려 한다. 또 독립야구단의 코치와 트레이너들을 뽑는 것도 일자리 창출의 일환이다. 점진적으로 인프라를 키우는 게 목표다. 당장은 독립구단 창단을 준비하고 있다.”

-꿈나무를 지도하게 되면 무엇을 제1의 가치로 두겠나.

“기술적인 부분보다 인성교육이 중요하다. 코치들이 인성교육도 해야 한다. 꿈나무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야구를 즐기는 자세도 중요하다.”

-타고투저 시대다. 투수 기근 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과하게 쓰니까 부상이 많은 것이다. 아마추어 감독님들도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없지만, 제도적인 문제가 크다. 훈련을 많이 한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10시간 할 것을 한두 시간에 마무리짓는, 필요한 부분을 채우는 훈련을 하는 게 중요하다. 은퇴 후에 느끼는 부분이지만, 미국과 일본은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들이 갑자기 사라지진 않는다. 5년, 10년 꾸준히 던진다. 우리도 선수를 우선시하는 야구를 해야 한다. 그러면 성적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야구는 성적이 우선이고, 선수는 차선이다.”

-박명환이 어떤 야구인으로 기억되길 바라나.

“남들이 하지 않았던 길을 개척하려 한다. 선수협도 만들었었다. 선수협 만들 때 76명으로 시작했다. 2군에 있는 선수들은 힘이 없어서 방출되기도 했다. 지금은 선수협이 자리를 잡았고, 한은회, 일구회 등 여러 모임이 생겼다. 야구는 국내 최고 인기스포츠 아닌가. 나는 후배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뛸 것이다. 아카데미와 에이전시를 통해 후배들이 은퇴 이후에도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운 선배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 박명환은?

▲ 생년월일=1977년 6월 7일 ▲ 출신교=청구초~충암중~충암고 ▲ 키·몸무게=186cm·92kg(우투우타) ▲ 프로선수 경력=두산(1996~2006년)~LG(2007~2012년)~NC(2014~2015년) ▲ 프로통산 성적= 326경기 103승 93패 9세이브 8홀드, 평균자책점 3.81 ▲ 지도자 경력=NC 육성군 투수코치(2016년)~성남 블루팬더스 투수코치(2017~2018년)

강산 기자 posterbo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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