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넘버1” 올 시즌 프로배구 남녀부 블로킹 개인 선두인 현대건설 양효진(오른쪽)과 한국전력 윤봉우가 23일 두 팀의 안방인 수원실내체육관에서 만났다. 현대건설의 훈련이 끝나고 한국전력의 훈련을 위해 네트 높이를 조정하던 도중 틈을 내 두 선수가 함께 네트 앞에 섰다. 수원=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효진아, 너 혼자 (블로킹) 다 잡으려고 하면 너만 스트레스 받아.”
23일 수원실내체육관의 선수 대기실. 프로배구 남자부 한국전력의 윤봉우(34)가 여자부 현대건설의 양효진(27)과 마주 앉으며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선배의 조언에 후배 양효진은 “꼭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보니 버릴 건 버린다는 게 말처럼 잘 안돼요”라며 하소연했다. 다시 윤봉우가 “그럴 때는 팀원들이랑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자 양효진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수원 블로킹 왕
갑작스레 양효진의 고민 상담(?)이 성사된 건 두 구단의 연고지(수원)가 같기 때문이다. 대표팀 생활을 하며 안면을 익힌 두 선수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윤봉우가 현대캐피탈(연고지 천안)에서 한국전력으로 팀을 옮기면서 더 마주할 기회가 잦아졌다. 이날도 훈련을 앞둔 윤봉우가 테이핑 작업 도중 “효진이는 독보적인 센터”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양효진도 “배구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고 날카로운 속공이 (선배의) 장점”이라며 찰떡호흡을 선보였다.
두 선수의 공통분모는 비단 연고지뿐만이 아니다. 팀에서 주전 센터를 맡고 있는 두 선수는 현재 남녀부에서 각각 블로킹 개인 선두를 달리고 있다. 양효진이 세트당 0.857개, 윤봉우가 0.745개의 블로킹을 기록하고 있다.
센터의 상징과도 같은 블로킹에서 개인 기록 선두라는 건 두 선수 모두에게 큰 영예다. 윤봉우는 “다른 동료들의 도움을 토대로 공격 득점을 만들어 내는 것과 달리 블로킹은 온전히 선수 개인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공격보다 블로킹을 성공했을 때 쾌감이 훨씬 커서 나도 모르게 세리머니도 더 크게 나온다”고 말했다. 데뷔 세 번째 시즌(2009∼2010)부터 블로킹 타이틀을 독식해온 양효진 또한 “블로킹은 나에게 배구선수로서의 이유와 같다. ‘양효진=블로킹’ 등식이 성립하는 게 내 목표”라고 말했다.
블로킹 성공 비결로 ‘끊임없는 자기 점검’을 꼽은 양효진은 “높이, 타이밍, 네트와의 거리, 심지어 손 모양까지 신경 써야 한다. 경기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블로킹에서 뭐가 잘되고 잘되지 않는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윤봉우는 “확률적으로 모든 공을 블로킹해 내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동료들의 수비를 믿고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효진이가 센터 개인의 역할을 강조한 거라면 저는 팀 차원의 역할을 이야기한 것”이라는 윤봉우의 말에 양효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 연봉 퀸과 이적생
같은 블로킹 선두이긴 하지만 두 선수가 처한 입장은 다르다. 여자부 연봉 퀸(3억 원) 양효진이 타이틀을 지켜야 하는 챔피언이라면 전 소속팀의 은퇴 권유 속에서 한국전력으로 팀을 옮긴 이적생 윤봉우는 제2의 배구 인생을 시작한 도전자다.
“프로무대에서 못 뛰면 실업팀이라도 가겠다”며 각오를 다진 윤봉우와 한국전력의 만남은 서로에게 윈윈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전력은 2라운드 들어 5연승을 달리며 선두 자리에 있다. 윤봉우는 “(방)신봉이 형에 저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누가 더 멋진 세리머니를 하는지 경쟁을 벌일 정도로 팀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양효진은 “팀을 옮긴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흔들리지 않고 실력을 발휘하는 게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반면 지난 시즌 여자부 챔피언이었던 현대건설은 현재 주전들의 컨디션 난조로 3위에 머물러 있다. 양효진 또한 올림픽 출전 등으로 피로가 누적되면서 현재 어깨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이에 양효진이 “시즌 초반부터 너무 처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하루빨리 반환점을 찾아야 한다”며 걱정을 드러내자, 윤봉우는 “우승을 경험해본 선수들의 경기감각이나 자신감은 무시할 수 없더라. 장기 레이스인 만큼 길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 프로 생활이 남긴 교훈
2002년 데뷔해 줄곧 주전을 도맡아온 윤봉우에게 교체 선수로 뛴 지난 시즌은 단순히 한 시즌 이상의 의미였다. 윤봉우는 “코트 밖에서 배구를 보면서 어떻게 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코트 안의 시간이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적 뒤 팀 성적이 잘 나오면서 아내나 주위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동료들에게도 더 고마움을 갖게 됐다는 윤봉우는 전광인 등 젊은 선수들이 주축인 한국전력의 팀 색깔에 맞추기 위해 머리색도 더 밝게 염색했다.
데뷔 10번째 시즌을 맞은 양효진 또한 어느새 소속팀뿐만 아니라 대표팀에서도 허리가 됐다. 양효진은 “선수로서의 미래가 불투명했던 스무 살 때는 하루라도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는데 막상 30대를 앞두고도 무언가를 갈구하는 건 똑같았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주어진 상황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자는 게 10년을 통해 배운 교훈”이라고 말했다.
배구 외에 인생 고민을 묻자 두 선수는 이내 서로를 쳐다보고는 불쑥 웃었다.
두 사람은 “배구가 잘되면 모든 걱정이 다 풀린다. 배구를 빼면 고민이 없다”고 입을 모은 뒤 코트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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