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이 공만 찼는데…” ‘미생’ 축구선수 김형필 사연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9일 16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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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직업을 물어보는 게 싫었습니다. 축구선수라고 소개하면 자꾸 설명이 길어져서요. 30년 가까이 공차는 것만 알고 살았는데 이상한 일이죠.

저는 2013년 K3리그(프로 4부 리그 격) 청주직지 FC에서 득점왕이 됐고, 지난해에는 화성 FC로 팀을 옮겨서 우승까지 했습니다. 축구클럽(FC)이라는 이름이 붙은 팀에서 득점왕에 우승까지 했는데 왜 축구선수가 아니냐고요?

지난 2년 동안 제 공식 직업은 ‘공익’, 공식 명칭으로는 사회복무요원이었습니다. 낮에는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일을 하고 퇴근 후에 운동을 했습니다. 수입은 국방부에서 나오는 월급 10여 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소속팀이 따로 있었냐고요? 그게 좀 복잡합니다.

올해 여름 소집해제가 되면서 신분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돈 받고 뛰는 축구선수가 됐지만 여전히 프로선수는 아닙니다. 6월 합류한 ‘경주한국수력원자력(경주한수원)’이라는 팀은 내셔널리그(N리그) 소속입니다. 프로 3부 리그 격이지만 실업팀이지요. 저와 제 동료들은 프로선수처럼 연봉을 받지만 팀은 프로팀이 아닙니다.

한때 저도 프로선수였습니다. 5년 전 경희대를 졸업하면서 K리그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습니다. 2010년 8월 26일을 떠올리면 언제나 짜릿합니다. 프로 무대에서 데뷔 골을 넣은 날이거든요. 경남 골문을 지키고 있던 골키퍼는 ‘전설’의 김병지(45·현 전남) 선배였습니다.

골대 그물이 출렁하던 순간, 생각했습니다. “축구선수가 되길 잘 했구나!” 당시 경기 전 박항서 감독님(56)께서 “오늘은 비기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하셨는데 제 골 덕분에 팀이 1-1로 비길 수 있었습니다. 이후 부산과 대전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도 연달아 골을 넣었습니다. 데뷔 시즌에 3경기 연속 골을 넣은 선수는 아마 제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사건이 터진 건 프로 데뷔 첫 선발 출장한 수원과의 방문 경기였습니다. 그 전 경기는 모두 후반에 ‘조커’로 교체출전 했습니다. 당연히 그날은 의욕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슈팅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0-0으로 경기가 끝날 분위기였죠.

그래서 무리해서 슈팅을 했나 봅니다. 오른발로 공을 차는 순간 발등이 상대 수비수의 발과 부딪혔습니다. 팀 닥터가 보더니 “아이고 이거, 발등이 완전 ‘아작’났네”라고 말했습니다. 철렁했습니다. 정말 아팠지만 모처럼 잡은 기회를 날리게 될까 겁이 났습니다.

다행히 단순 타박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가 데뷔 첫 해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재활에 매진해야 습니다. 겨울이 되니 부상이 모두 나은 듯했지만 오른발로 슈팅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다칠까 두려웠습니다.

오른발을 못 쓰는 오른발잡이 공격수를 기다려주는 팀은 없었습니다. 프로 2년차인 2011년 제 기록은 2경기 교체 출전에 슈팅 0개. 데뷔 첫 해 저와 주전을 다투던 지동원(24·아우크스부르크)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그 해에 저는 슈팅을 하나도 하지 못한 공격수가 됐습니다. 그해 연말 저는 부산으로 트레이드 됐습니다. 부산에서도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1년 동안 교체 선수로 단 한 경기에 나섰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즌이 끝난 뒤 더욱 독하게 마음먹었습니다. 몸을 제대로 만들어서 다시 도전해보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관중이 들어찬 경기장에서 골을 넣는 느낌은 축구선수가 아니면 절대 모릅니다. 빠르게 달려 수비수를 제치고 골키퍼와 맞서 침착하고 정확하게 골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 모두의 눈이 최전방 공격수인 저를 향합니다. 고막이 터질 듯한 관중들의 함성을 생생히 기억하는데 만년 후보 선수로만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휴가 중에도 쉬지 않고 몸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구단 프런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형필아, 다른 팀 알아봐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습니다. 그 다음 들은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계약 파기해야 될 것 같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대체 왜?”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밖에 몰랐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에도 곧잘 골을 넣었고 프로에서도 신인치곤 나쁘진 않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몸 상태도 점점 올라오고 있었고 계약 기간도 1년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도 제대로 줘보지 않고는 방출이라니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 길로 고향인 전남 순천시로 갔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이해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두 분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저는 하루아침에 불효자가 됐습니다.

갑자기 목표가 없어지니 아무 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그래도 마냥 놀 수는 없어서 아버지 일을 도왔습니다. 아버지는 순천에서 계란 도매업을 하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와 1.5t 트럭을 타고 동네 식당 등 거래처에 계란을 배달했습니다. 오전 중에 일이 모두 끝나 오후에는 빈둥대다 밤에는 동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 연락을 하는 프로 구단이 있었지만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분하고 속상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를 지도해주신 은사님이 “N리그 입단 테스트를 보면 어떻겠느냐”고 말씀해 주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술김에 “축구를 접겠다”고 말을 꺼내자 친구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사실 술김에 꺼낸 말도 아니었습니다. 축구가 저를 안 받아주는데 저를 원하는 팀이 없는데 어떻게 축구를 하겠습니까. 매일같이 입만 열면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제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을 찼습니다. 중학교 때 축구를 그만둔 친구도 있고, 고등학교까지 선수생활을 했던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모두 짠 것처럼 한 목소리였습니다. “너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축구인데 그걸 안 하면 어쩌겠다는 거냐?” 자기들은 더 이상 공을 차지 않으면서 왜 제게만 그러는지 짜증이 났습니다.

친구들은 “계속 그럴 거면 군대부터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잔소리를 듣다못해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신체검사를 다시 받았습니다. 4급 판정이 나왔습니다. 원래부터 허리 통증을 달고 살았거든요.

4급을 받으면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생활을 하는데 복무를 하면서 K3리그에서 뛸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은사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 전화를 하셨습니다. “형필아, 너를 원하는 팀이 있다. 쓸 만한 공격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다니는 저를 아직도 쓸 만한 공격수로 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렇게 K3리그 청주직지 FC 선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득점왕과 우승이었습니다. 4주 동안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뒤 충북 청주시의 한 동사무소 사회복지과에서 일했습니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훈련한 뒤 주말에 경기를 뛰었습니다. 감독님은 저처럼 프로에서 상처를 입고 온 선수들에게 “즐겁게만 차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축구를 즐겼습니다. 즐기다 보니 19경기에서 27골을 넣어 득점왕이란 목표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꾸준히 경기를 뛸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조건은 정말 나빴습니다. 팀 사정이 어려워 약속받은 승리수당을 몇 100만 원이나 못 받았습니다. 전국체육대회에서 N리그 팀을 연파하고 은메달을 땄을 때도 수당은 2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용돈벌이’라도 할 수 있는 팀으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주소지를 이전해야 했습니다. 주소지 이전 신청을 하니 병무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사회복무요원 근무지 배정은 주소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축구선수인데 팀을 옮기게 됐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냥 이사를 간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렇게 지난해 화성 FC로 이적했습니다. 새로운 팀에는 저 같은 K리그 출신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한 번씩 실패를 겪은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더 간절하게 공을 찼습니다. 군 복무와 운동을 병행하기 때문에 훈련 량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같은 조건에서 맞붙으면 K리그 팀과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화성 FC는 K3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K3리그에 오며 세웠던 두 가지 목표를 다 이룬 것이죠.

올해 소집해제를 앞두고 다시 진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내년이면 서른, 여전히 경기를 뛸 수 없다면 축구를 그만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옛 동료들이 태국 2부 리그의 몇 팀을 소개해 줬습니다. “축구하러 태국까지 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모르는 소리 말라더군요. 태국 1부 리그는 물론 2부 리그에도 K리그 출신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웬만한 ‘스펙’ 없이는 2부 리그 팀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경기만 뛸 수 있으면 어느 팀이라도 좋다는 생각에 제 경기 영상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기다려도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6월 소집해제를 앞두고 결혼도 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지금의 팀인 경주한수원 입단을 결정지었고요. 일이 잘 풀리는 것은 다 아내 덕분인가 싶습니다. 아내는 저를 줄곧 응원해준 사람입니다.

아내를 처음 소개받던 날, 유독 제 직업을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축구선수인데 지금은 프로에서 나와서 공익을 하고 있어요. 2년 동안 몸을 만들어서 다시 도전할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평일에 훈련하고 주말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런 거죠.”

아내는 긴장한 제 얼굴을 보면서 활짝 웃어줬습니다. 처음 인사드릴 때 “그래 가지고 먹고는 살겠느냐”며 걱정하시던 장인어른 장모님도 요즘은 축구선수 사위가 자랑스러워지신 모양입니다. 결혼을 앞두고는 닭도 잡아 주시고, 영양탕도 해 주시는 바람에 살이 찌기도 했습니다. 장모님은 저 몰래 아내와 경기를 보러 오신 뒤 “김 서방이 잘하긴 잘하는데 다칠까 걱정된다. 맛있는 것 많이 해 줘야 겠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사실 제가 좀 잘하긴 합니다. 경주한수원에서 뛴 3경기에서 모두 7골을 넣었는데 해트트릭(3득점)도 두 번이나 했으니까요. 아내 뱃속에 있는 우리 ‘복덩이’에게 K리그에서 멋진 골을 터트리는 아빠 모습도 보여줘야죠. 축구선수 김형필(28). 다시 신인이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오른발 강슛입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남양주=박민규 인턴기자 고려대 교육학·사회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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