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부르면 나라도…” 영원한 국민타자… 정들었던 태극마크 떼는 이승엽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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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서 마지막 타석

《 “야구는 이름값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 역할은 뭐랄까, 조커 같은 거라 생각해요. 대타든 뭐든 팀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올 초 삼성 시무식에서 만난 이승엽(37)은 이렇게 말했다. 이승엽이 누군가.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504개의 홈런을 쳤고,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 굵직한 국제대회에서 해결사 역할을 도맡아 했던 ‘국민 타자’ 아닌가. 그렇지만 이승엽은 스스로를 ‘대타 요원’이라고 불렀다. 대표팀에는 이승엽 외에도 이대호(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김태균(한화)이라는 걸출한 1루수가 2명이나 더 있기 때문이었다. 》
1루수와 지명타자로 2명이 선발 출장하면 나머지 한 명은 벤치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이승엽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이승엽은 “이번 WBC가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마지막 대회라고 생각한다. 좋은 마무리를 짓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 WBC에서 마지막 불꽃을

이승엽의 말은 현실이 됐다. 2일 대만 타이중 인터콘티넨털 구장에서 열린 WBC 1라운드 네덜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그는 초반에 벤치를 지켰다. 상대가 왼손 투수 디호마르 마르크벌을 선발 투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류중일 감독은 ‘플래툰 시스템’을 적용해 왼손 타자 이승엽을 빼고 오른손 타자 김태균과 이대호를 3, 4번 타자로 선발 출장시켰다.

말로는 “대타 요원도 괜찮다”고 했지만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천하의 이승엽이 벤치를 지킨다는 것은 몇 해 전만 해도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승엽은 전혀 개의치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기회는 이틀 뒤인 4일 호주전에서 찾아왔다.

이날 경기에 3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장한 이승엽은 1회 첫 타석부터 우중간에 떨어지는 큼지막한 2루타로 포문을 열었다. 네덜란드전에서 4안타에 그치는 등 극심한 침체에 빠져 있던 한국 타선에 붙을 붙인 소중한 안타였다. 이날 그는 5타수 3안타 1타점 2득점의 맹활약을 펼쳤다. 이승엽이 이끈 한국 타선은 이날 장단 11개의 안타를 쳐내며 호주를 6-0으로 이겼다.

○ 항상 미안해했던 국민타자


이승엽이 위기에 빠져 있던 대표팀을 구해 냈던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경기 종반인 8회에 결정적인 홈런이나 안타를 쳐 여러 차례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승엽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0-0 동점이던 8회 말 마쓰자카 다이스케(클리블랜드)를 상대로 좌중간을 가르는 결승 2타점 2루타를 터뜨렸다. 이 한 방으로 한국은 동메달을 따냈다.

200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회 WBC 아시아 예선에서는 1-2로 뒤진 8회 초 이시이 히로토시를 상대로 우측 담장을 넘기는 역전 결승 2점 홈런을 쳤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에서는 2-2로 팽팽하던 8회 말 일본 최고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주니치)를 상대로 승부의 균형을 깨는 결승 2점 홈런을 터뜨렸다.

하지만 영광만큼 아픔도 많았다. 그는 “많은 대회에서 부진하다가 중요한 경기에서 한두 번 잘 쳤을 뿐이다. 당시 동료들에게 항상 ‘미안하다, 내일은 꼭 잘할게’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했다.
○ 아듀, 태극마크

한국 대표팀에서 이승엽만큼 주요 국제대회 때마다 부름을 받은 선수는 찾기 힘들다. 부담스럽고 피곤할 만도 했지만 그는 “나라가 부르면 나가는 게 당연하다”며 거의 모든 주요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2009년 제2회 WBC에만 당시 소속팀 요미우리의 반대로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여러 차례 김인식 감독(현 한국야구위원회 기술위원장)을 만나 미안함을 표시했다. 이승엽은 “지금껏 나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으니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국민들에게 그 기쁨을 돌려드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승엽은 “내 야구인생은 8회쯤 온 것 같다”고 했다. 나이로나 기량으로 볼 때 한국 대표팀은 이번 WBC를 마지막으로 그를 놔줘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앞으로 국제대회에서 해결사가 필요할 때마다 그의 모습을 많이 그리워 할 것 같다.

타이중=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이승엽#W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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