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렸다. 지난날 한국축구대표팀에 대해 '육탄 공격적'이라거나, '신흥공업국 같다'는 말을 함부로 썼던 것은 정말 커다란 결례가 아닐 수 없다."
9년 전인 2002년 6월. 일본의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무라카미 류 씨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그는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른 데 대해 정말 놀랐다"며 한국축구에 대한 그동안 자신의 평가가 잘못됐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한국팀이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고도의 첨단 축구를 선보였음에도 그 때는 이를 과소평가했다"며 "한국이 스페인을 상대로 싸우는 것을 보고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축구광이기도 한 무라카미 씨가 분석한 한국축구 급성장의 비결은 바로 노련미와 젊음이 잘 조화를 이룬 팀을 탄생시킨 거스 히딩크 감독의 선수 선발 능력과 용병술.
그는 "히딩크 감독이 선수 개개인이 가진 잠재 역량을 발굴해내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고 개성파를 대거 인선한 점이 한국팀의 실력 급성장에 기여했다"고 평했다.
2002한일월드컵 때 골이 터지자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히딩크 감독. 연합뉴스 2002월드컵에서 한국축구를 세계 4강에 올려놓은 히딩크 감독은 그해 6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기업을 비롯해 사회 각 분야에서는 '히딩크 배우기'가 유행했고, 한 유명대학 행정학과에서는 '히딩크 감독의 한국축구대표팀 조련이 정책학에 비춰볼 때 합리적, 분석적 결정 전략을 따랐는가 아니면 점진적, 합의적 결정 전략을 따랐는가'라는 문제가 기말고사 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
사실 히딩크 감독은 2000년 한국축구대표팀 지휘봉을 잡기 전에 이미 네덜란드대표팀과 스페인 프로축구의 명문 레알 마드리드 사령탑 등을 지낸 명감독이었다.
이런 지도자였기에 대한축구협회를 비롯해 국내 축구계가 모든 의사 결정을 히딩크 감독에게 일임했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라카미 씨가 지적했듯이 히딩크 감독이 용병술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선수 선발이나 훈련 방식 등에서 협회를 주축으로 축구계 전체가 히딩크 감독에게 전권을 일임한 것이 큰 뒷받침이 된 게 틀림없다.
최근 2014년 브라질월드컵을 목표로 구성된 한국축구대표팀 사령탑이 선수 선발 문제를 놓고 협회 기술위원회와 마찰을 빚고 있다.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한국축구대표팀 조광래 감독. 스포츠동아DB 축구대표팀 조광래 감독은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감독의 고유 권한인 선수 선발에 간섭하지 말라"며 공개적으로 요구해 파장을 일으켰다.
조 감독은 "국가대표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업무인 대표선수 선발권에 대한 기술위원장과 대표팀 감독의 권한은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제시하고,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된 것과 같이 국가대표팀 감독의 언론 인터뷰 시 협회의 사전 통제를 받아야 하는 지도 답변을 해 달라"며 협회 기술위원회에 요구했다.
히딩크 감독 때를 생각하면 국가대표팀 감독의 입에서 왜 이런 불만이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축구계 상황을 들여다보면 히딩크 감독 때와는 다른 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대표팀을 맡을 때는 한국이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열게 된 개최국이었고, 안방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한국축구가 최소한 16강 이상을 달성해야 할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러니 축구계뿐만 아니라 전 국민적으로 축구대표팀과 히딩크 감독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브라질 월드컵보다는 당장 내년 런던올림픽에서 사상 최초의 메달 획득이 급선무로 다가와 있는 상황이다.
이러다보니 축구협회에서는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축구대표팀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고, 히딩크 감독 때처럼 전폭적으로 축구대표팀만 지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히딩크 감독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협회 관계자들과 소소한 마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히딩크 감독은 이럴 때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분쟁을 잠재웠다. 핸디가 7~8정도의 싱글 플레이어인 히딩크 감독은 관계자들과 필드에서 만나 골프를 치면서 오해를 풀기도 했다.
월드컵 개막을 5개월 여 앞둔 2002년 1월. 무릎이 안 좋은 데도 불구하고 협회 직원과 축구 관계자 그리고 축구 기자 등과 북한산 산행을 끝낸 히딩크 감독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부르며 성공 월드컵을 목표로 화합의 분위기를 만들었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현재 터키대표팀을 맡고 있는 히딩크 감독은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명문구단 첼시로부터는 감독이나 단장으로, 네덜란드로 아약스 구단으로부터는 이사로 영입 제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쾌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쳤던 히딩크 감독. 요즘의 국내 축구계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히딩크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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