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 기자가 간다] 피겨스케이트 체험

  • 입력 2009년 8월 4일 08시 33분


길고, 가녀린 팔로 열어젖힌 이야기의 장막. 관객은 천일야화에 귀를 기울였다. 부정(不貞)한 왕비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세상 모든 여성을 죽이려 했던 아라비아의 왕. 그 앞에서, 하루하루 삶을 연장해 가는 연약한 여인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1001일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다시 찾은 왕처럼, 세헤라자데는 관객의 내면을 어루만진다. 2008-2009시즌 김연아(19·고려대)의 프리스케이팅 ‘세헤라자데.’ 전문용어를 모르더라도 피겨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역설적으로 세계최고의 기술을 구사한다는 선수의 연기를 통해서였다. 분석 없이도 퍼지는 마음의 울림.

그 때부터 꼭 한 번 빙판위에 서보겠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현대카드 슈퍼매치Ⅷ-슈퍼클래스 온 아이스’에서 마련한 특별한 수업. 세계적인 선수들이 한국 팬들을 위해 일일코치로 나섰다. 31일, 잠실학생체육관 특별 아이스링크를 찾았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스케이트라고는 초등학교 시절, 두세 번 타본 것이 전부. 초보자 입문과정(클래스4)에 등록을 마쳤다. 클래스4 코치는 2009세계피겨선수권 여자 싱글 2위 조아니 로셰트(23), 2008세계피겨선수권 남자 싱글 1위 제프리 버틀(26·이상 캐나다), 그리고 SBS 방상아 해설위원.

주최즉이 마련한 흰색 방풍 재킷을 덧입으니, 딱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오데트.’ 오동통한 백조가 됐다. 10여명의 클래스4 참가자들은 모두 초보 스케이터. 가만히 서있는 것도 힘들어 ‘기우뚱기우뚱’이었다. 방상아 해설위원이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된다”면서 “모두들 바닥에 넘어지라”고 했다. 소위 신고식.

넘어지면 ‘아프다’는 생각보다 ‘창피하다’는 생각이 먼저다. 빨리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허겁지겁 ‘배치기’로 일어나다가는 또 넘어진다. 다시 서는데도 방법이 있다. 먼저 왼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왼 무릎 위에 포개, 체중을 실으며 일어난다.

○조기교육의 필요성 절감

다음은 기본 스케이팅. 발을 ‘ㄴ’ 모양으로 만들어 앞 쪽 발에 체중을 실으며 뒷발로 얼음을 지치고 나간다. 스케이트 날에는 인사이드 에지와 아웃사이드 에지가 있는데, 이때는 주로 인사이드 에지를 사용하는 것이 균형 잡기에 용이하다. 슬슬 몸이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 들어, 속력을 냈더니 ‘꽈당.’ 여기저기서 넘어지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유연한 곡선 움직임이 많은 피겨에서 걸음마와 같은 것이 ‘두 발로 항아리 그리기’다. 방상아 해설위원이 다리를 벌렸다가 부드럽게 오므리자, 빙판 위에 항아리 모양이 새겨졌다. 하지만, 나는 항아리를 절반 밖에 못 만들었는데도 스케이트가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일단, 기본 스케이팅이 안 되니 다리를 벌리자마자 금세 속력이 줄어버린 것. 박민혁 군을 비롯해 옆에 있던 초등학생 참가자들은 이리저리 항아리를 잘도 만들고 다닌다. 방하림(롯데월드 아이스링크강사) 플레잉코치는 “빠르게 배우는 분들은 하루만에도 항아리모양을 마스터 한다”고 했다. 조기교육의 필요성 절감. 방상아 해설위원은 “선수로 키우려면 만 4-7세 때는 (피겨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김연아는 6세 때 처음으로 스케이트 화를 신었다.

○로셰트는 인간팽이, 나는 인간문어

일일코치 로셰트에게로 이동. 로셰트는 항아리 대신 파인애플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파인애플은 항아리에 점프가 더해진 것. 항아리를 만든 뒤 점프로 빙판을 찍으면, 파인애플 잎사귀가 만들어진다.

2008-2009국제빙상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시리즈 3차 대회 여자싱글 3위 곽민정(15)은 “피겨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잦은 부상”이라고 했다. 점프한 뒤 착지하는 순간이 가장 큰 문제다. 발목이며 꼬리뼈의 인대가 늘어나는 일쯤은 예사.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데, 점프를 하려니 두려움이 엄습한다.

스포츠심리학자인 게리 맥은 “최고로 위험한 행동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했다. 맥은 그의 저서 ‘마인드 스포츠’에서 “미셸 콴(29)이 1998나가노동계올림픽에서 너무 안전한 경기를 펼쳐 금메달을 놓친 반면, 잃을 것이 없다는 기세로 덤빈 타라 리핀스키(26·미국)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고 적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용기를 내 과감하게 점프했지만 역시 결과는 ‘꽈당’이었다.

로셰트는 이어 스핀기술을 전수했다. 두 팔을 벌렸다가 돌리면서, 몸의 회전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관건. ‘뒤뚱뒤뚱.’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자 몸은 계속 돈다. 돌고 싶어 도는 게 아니라 빙판에 나뒹굴기 싫어 빙빙. 머릿속은 점점 어질어질해진다. 이유리(2008전국동계체육대회1위) 플레잉 코치는 “스핀을 하기직전 식사를 하면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 정도”라고 했다.

무한자전에 놀랍다는 듯 로셰트가 다가와 한 마디 던졌다. “You're so funny. You're like a Octopus(너무 재밌다, 너 꼭 문어 같아).” 로셰트에게 “당신은 얼마나 돌 수 있냐?”고 물었다. 상냥한 미소로 “안 세어봐서 잘 모르겠다”고 답한 로셰트는 “시범을 보이겠다”며 사정없이 돌기 시작했다. 엄청난 회전속도와 안정된 자세. 이것은 인간팽이였다.

○더 잘 타기 위해서는 수 없이 넘어져라

많이 넘어지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강의가 끝나자 로셰트가 불렀다. “그런데, 넌 (피겨) 얼마나 배웠니?”, “오늘이 처음”이라고 답하자 로셰트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어려운 것을 시켜서 미안하다”며 따뜻하게 포옹했다. “더 잘 타려면 수 없이 넘어지라”는 조언과 함께.

1968그레노블 동계올림픽 여자피겨 금메달리스트인 페기 플레밍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을 위해 거쳐야 하는 그 모진 훈련의 과정이 스스로에게 납득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유리 플레잉코치는 “더블 악셀 점프를 숙달하려면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본적인 스핀을 익히는데도 6개월이 걸린다.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재즈댄스와 발레를 배우고, 거울 앞에서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 허리와 발목 부상은 평생의 짐. 그렇게 하루 6시간씩, 10년 이상 빙판을 누벼야 손짓 하나로 타인의 마음에 감정의 물결을 만들 수 있다. 곽민정은 “아직 내 연기에 스스로 감동을 받아본 적은 없기에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방풍 재킷 안으로 주르르 흐르는 땀. 꽉 조이는 스케이트 화와의 사투 속에 아려오는 발바닥. 세계선수권에서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뒤, 굳게 다문 입술로 눈물을 닦던 피겨여왕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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