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점 탐험]12월14일 15일째 발밑은 사스투루기

  • 입력 2003년 12월 17일 14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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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아웃에서 벗어나고 있는 탐험대원들.  멀리 남쪽하늘이 푸른빛을 띠며 개고 있다.
화이트 아웃에서 벗어나고 있는 탐험대원들. 멀리 남쪽하늘이 푸른빛을 띠며 개고 있다.
날씨 : 출발과 함께 화이트 아웃/11:30부터 맑음

기온 : 영하 15도

풍속 : 초속 5m

운행시간 : 06:50 - 17:50(11시간00분)

운행거리 : 28.9km (누계 :263.1km) /남극까지 남은 거리: 871.4km

야영위치 : 남위 82도 11분843초 / 서경 80도 41분 710초

고도 : 918m

▽남위 82도를 넘다▽

아침 출발과 함께 남쪽 하늘이 심상치 않더니 화이트 아웃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러나 대원들은 주저 없이 남쪽을 향해 움직였다. 잠깐사이 하늘이 '백색 방'으로 변해 버렸다. 보이는 모든 것이 백색일색이다. 발밑이 보이지 않아 사스투루기(sastrugi ; 바람에 의해 설원이 홈통모양으로 깎인 것)에 유난히 썰매가 잘 뒤집힌다. 한자리에서 10번 정도 계속해서 썰매가 같은 모양으로 뒤집어지며 가길 거부하자 강철원 대원은 분풀이로 썰매에 발길질이다. 오늘 구간은 사스트루기가 유난히 많다. 대원들이 썰매와 나란히 붙어서 움직일 때는 썰매의 짙은 색깔로 바닥과 어느 정도 분간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박대장은 휴식시간에 대원들에게 썰매에 바짝 붙어서 갈 것을 지시했지만 썰매가 넘어지면 10m이상 간격이 벌어져 붙어갈 수가 없으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발 한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사스트루기 속에 처박힌 썰매는 냉정하게 주인을 외면한다. 마음대로 해보라는 식이다. 어쩔 수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해서 끌어내는 수밖에.

▽화이트 아웃 속에서의 환영(幻影)▽

대원들이 화이트 아웃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촬영한 뒤 맨 뒤에 출발한 이치상 대원은 앞서간 대원들을 따라 잡기위해 안간힘을 쓰며 끌려가길 거부하는 썰매를 어르고 달랜다. 있는 힘을 다해 보지만 대원들과의 간격은 그대로다. 대원들이 모두 멈춰 서서 기다려야 겨우 따라 붙을 수 있지만 다시 출발 후 앞서가는 대원의 썰매가 넘어진 것을 촬영하다보니 또 한참 뒤떨어진다. 대원들과의 거리 사이를 채운 공간은 벽과도 같다. 그 벽을 아무리 넘어서려 해도 그럴 수 없다. 스키고글을 통해서 보이는 가상의 길은 눈앞의 흰 공간뿐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가 없다. 우측으로는 개울이다. 하천 바닥에는 둥근 돌들이 눈에 덮여있고 흐르고 있어야 할 시냇물도 얼어있고 그 위로도 눈이 덮여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은 뚝방 길이다. 개울 건너편의 뚝방 길에 키 큰 버드나무가 작은 가지 끝까지 하얀 서리를 뒤집어 쓴 채 맞은 편 뚝방을 걸어가는 대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보아 왔던 풍경이라는 생각에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아무것도 없다. 짙은 가스에 가린 남극의 설원일 뿐이다. 꿈을 꾼 듯 하다.

지평선 쪽 하늘이 파아란 띠를 이루며 열리더니 어느 순간 해가 나타난다. 화이트 아웃이 4시간 만에 뒤로 물러났다. 발밑이 보이자 사스트루기가 아름답기만 하다. 조금전만해도 대원들에게 딴죽을 걸던 것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자연이라는 위대한 조각가가 빚은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앞쪽의 설원은 평지. 사스트루기를 피해가며 박대장이 화이트 아웃으로 인해 늦은 거리를 만회하기 위해 속도를 더한다. 탐험 보름째를 맞으면서 대원들 중 다리가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아프다'느니 '쉬어가자'느니 하는 말없이 잘 따라 붙는다. 앞으로 가지 않으면 남극점이 스스로 우리에게 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대원들은 잘 알고 있다. 발꿈치가 깨지는 고통을 안고서라도 남쪽으로 쉬지 않고 걷는다. 고통은 오히려 이런 장기간 탐험의 동반자이다. 고통을 참을 수 없으면 즐기면 된다. 오후 4시 휴식 시간. 앞쪽으로 펼쳐진 넓은 설원이 유난히 평평해 보인다. 저 넓은 설원 어딘가에서 오늘의 운행이 멈춰진다는 생각에 찬바람 부는 설원이 고향처럼 느껴진다. 남극의 추위와 무한대의 설원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걸까.

출발한지 꼭 11시간 만에 박대장은 운행을 멈춘다. 설원을 걷다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텐트 칠 정도의 평평한 눈밭 위를 스틱으로 가리키면 그곳이 곧 탐험대의 안식처가 된다.

15일을 걷는 동안 263.1km를 걸었고 남위 82도를 오늘 아침에 넘어섰다. 운행 속도가 상당히 좋다. 2일에 한번씩 탐험대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대행사 A.L.E와 통화를 하는데 오늘 연락에서 그들도 '놀랍다'고 탐험대의 운행속도를 표현했다.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매일 매일 최선을 다 한다"

이것이 박대장이 정한 남극점 탐험대의 운행지침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최선을 다했는가?

대답은 "그렇다"

남극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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