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프로야구]“염주 만지며 마음안정 찾죠”…뉴욕메츠 서재응

  • 입력 2003년 11월 30일 18시 10분


전영한기자
전영한기자
2000년대 들어 생긴 야구기자의 신풍속도 하나. 미국이나 일본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귀국한 해외파 스타를 만날 때면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하는 것.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면 그 초조함은 몇 배로 커진다. 미국 진출 6년 만에 금의환향한 서재응(26·뉴욕 메츠)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웬걸. 서재응은 달랐다. 모교인 인하대 홍보대사 위촉장을 받는 바쁜 와중에도 먼저 다가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인터뷰 또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질문보다는 답변 양이 훨씬 많을 만큼 소문난 입심. 그래서 ‘나이스 가이’인가.

서재응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가치관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선수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잘 생긴 외모에 검은 재킷을 즐겨 입는 신세대 패션 스타. 선글래스에 목도리는 기본. 취미는 노래 부르기. 그러나 오른 손에는 항상 염주가 걸려 있고 불경을 들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귀국 후에도 여느 해외파 스타들과는 달리 호텔 생활을 사양했다. 곧바로 광주 집으로 내려가 병상에 계신 할머니를 문안했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교의 은사와 선후배들을 만났다.

기존의 인터뷰 방식을 바꿔 서재응이 털어놓는 ‘서재응의 사람들’ 얘기를 해보자.

:형 재환: 97년 12월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지 1년 6개월 만에 로스앤젤레스 센트럴 병원의 수술대에 올랐다. 끊어진 오른쪽 팔꿈치 인대를 잇기 위해 왼쪽 것을 떼 이식하는 대수술. 형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됐다. 그러나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지옥과도 같은 재활의 고통은 수술과는 비교도 안됐다. 그때마다 형이 옆에 있었다.

형은 나의 첫 우상이자 동료, 나아가 정신적 지주였다. 화정초등학교 3학년 때인 86년 외야수인 형이 야구하는 모습에 반해 처음 글러브를 끼었다. 인하대에 같이 진학했고 메츠도 함께 입단했다. 나는 135만달러의 계약금을 받았지만 형은 10만달러에 불과했고 그나마 99년 시즌을 마치고 중도 귀국했다.

그렇지만 형은 지금도 매일 국제전화를 걸어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손톱이 잘 깨지는 나에게 매니큐어와 손톱관리 세트를 꼬박꼬박 부쳐준다.

:아버지 서병관씨: 아버지는 호방한 성격에 무슨 일이든 거침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우리 형제에게 엄격했다. 형과 함께 몽둥이찜질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의 좌충우돌식 성격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아버지도 2001년 광주일고 1년 후배인 김병현이 월드시리즈에 나가 던지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당시 나는 재활훈련 중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안 마시던 깡 소주를 드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금도 내가 어려울 때면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신다.

:어머니 최경자씨: 아버지가 장외 코치와 매니저의 역할을 한다면 어머니는 ‘관세음보살’ 같은 분이다. 어머니의 충고대로 언제 어디서든 위기가 닥치면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진다. 염주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차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염주를 빼고 던지라고 치사하게 시비를 걸다니. 미국인들이 몸에 지니는 목걸이, 팔찌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앞으로 선수 소개할 때는 불경을 틀어달라고 할까 보다.

:토미 존: 내 지갑 속엔 내년 시즌을 끝내고 결혼할 여자친구의 사진과 함께 이젠 색깔마저 바랜 ‘베이스볼 카드’가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 바로 토미 존 카드다.

존은 내가 받았던 인대 접합수술(일명 토미 존 수술)을 74년 처음 받았던 주인공. 그는 수술을 받은 뒤 오히려 전성기에 들어섰다. 세 차례나 20승 투수가 됐고 89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88승을 올렸다. 내가 재기에 성공한 데는 이 카드의 효험을 톡톡히 봤다.

:주성노 인하대 감독: 요즘 내 우상은 커트 실링이다. ‘볼넷을 주느니 홈런을 맞아라’는 그의 말처럼 상대 타자에 대한 치밀한 준비와 도망 다니지 않는 강심장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전까지 우상은 랜디 존슨이었지만 수술 후 강속구보다는 제구력에 의존하게 되면서 실링으로 바뀌었다.

대학 시절엔 주성노 감독님이 내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왜소한 체격으로 투수와 3루수를 전전하던 내가 투수로 전업하게 된 것도 주 감독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팬: 팬들과의 대화는 빼놓지 않고 한다. 가장 감사해야 할 분들이기 때문이다. 독수리 타법이지만 홈페이지(www.jayseo.com)에 글을 올리고 가끔 채팅도 한다.

결혼은 내년 시즌 마치고 할 계획이다. 여자 친구는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달 중순쯤 국내에 들어오는데 일단 그쪽은 신경을 꺼 달라. 여자 친구가 부담스러워 한다.

김병현은 아끼는 후배이자 배울 게 참 많은 존경하는 선수다. 안 좋은 일이 생겨 안타깝다. 나는 언론에 잘못된 보도가 나오면 그때그때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편이다.

지난 5년간 꿈만 꿨다. 그리고 그 꿈이 올해 이뤄졌다. 내년 시즌에도 팬과 함께 더 큰 꿈을 키우고 싶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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