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그후 1년]“쿠엘류감독 믿고 따르라”…히딩크 인터뷰

  • 입력 2003년 5월 28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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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이 지났네요.‘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PSV 아인트호벤 감독(오른쪽)이 월드컵 1년을 맞아 본지 박제균 파리특파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 자리에서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와 한국 국민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 보였다. 아인트호벤=최삼열통신원
‘벌써 1년이 지났네요.‘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PSV 아인트호벤 감독(오른쪽)이 월드컵 1년을 맞아 본지 박제균 파리특파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 자리에서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와 한국 국민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 보였다. 아인트호벤=최삼열통신원

《31일이면 2002월드컵축구의 막이 오른 지 꼭 1년. 온 나라에 넘실댔던 흥분과 감동이 아직도 새롭다. 그 후 한국축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히딩크호에 이은 쿠엘류호가 출범했고, 월드컵 4강의 주역들은 유럽과 일본에서 또다른 신화를 엮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공동개최국인 한일 양국 모두 월드컵 후유증을 앓고 있다. 본보는 월드컵 1년을 맞아 ‘2002 월드컵 그후 1년’ 을 3일에 걸쳐 싣는다.》

네덜란드 거스 히딩크 PSV 아인트호벤 감독(57)은 여전히 바빴다. 26일 아침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팀 트레이닝캠프를 찾은 기자는 히딩크 감독이 오전 훈련을 마치고 코칭스태프와 회의를 끝낸 뒤 점심시간을 훨씬 넘겨서야 그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한국과 한국 팬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간이 서운했던 대목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금 같은 한국 축구의 전환기에는 움베르토 쿠엘류 감독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후임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2002월드컵 그후 1년▼

- ‘4강 신화’ 1년… 다시 모인 광장의 주역들
- 뜨거웠던 ‘붉은함성’ 추억으로 끝나는가
- [랍 휴스 칼럼]쿠엘류-히딩크 비교하지 말라

―벌써 1년이 지났다. 지난해 월드컵축구대회 때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전날 한국 정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이기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처럼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해준다는 것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이 메시지를 전했더니 선수들은 서로 끌어안으며 격려했다. 가슴이 찡했다. 다음날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처음부터 월드컵 4강을 기대하지는 않았을텐데….

“물론이다. 그러나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월드컵 직전 한국 선수들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까지 이길 줄은 몰랐다.”

―한국 대표팀 감독 시절 가장 힘들었던 점은….

“월드컵을 앞두고 내가 택한 험한 길은 일부의 반대를 불러왔다. 우리는 프랑스 같은 강팀들과 경기했다. 질 수도 있지만 지는 것도 선수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에선 “히딩크 감독이 또 졌다”고 흥분했다. 왜 약한 팀과 경기해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키워주지 않느냐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승리는) 문제점을 감출 뿐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한국팀 감독을 맡을 것인가.

“지금 한국팀의 쿠엘류 감독이 잘하고 있지 않은가. 1년 더 아인트호벤팀에 전념할 것이다. 2004년 올림픽, 2006년 월드컵에 무슨 일이 있을지 말하기는 이르다.”

―네덜란드 방송에 나가 ‘한국 국민의 기대가 너무 높아 한국팀을 맡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나.

“다시 맡는 것이 현명한가 하는 원론적인 얘기를 했다. 독일 월드컵을 휩쓸 유럽 축구는 터프하고 빠르다. 한국팀은 16강만 진출해도 엄청난 성과다. 나는 (방송에서) 지난해 월드컵 같은 일이 재현되기가 어렵다고 했다.”

―지금 한국팀의 실력이 지난해 월드컵 때보다 줄었다는 뜻인가.

“한국 축구는 지금 전환기다. 주요 포지션을 맡은 선수들이 2004년 올림픽과 2006년 월드컵 때 30세 이상이 된다. 쿠엘류 감독은 새 선수를 발굴해 경험을 쌓게 해야 하는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

―쿠엘류 축구와 히딩크 축구는 뭐가 다른가.

“쿠엘류 감독을 개인적으로 잘 안다. 그는 강팀을 지도했던 경험 많은 지도자다. 내가 그를 추천했다.”

―지난해 월드컵 이후 세계 축구의 흐름은 어떻게 변했나.

“스피드와 힘을 더 요구하고 있다. 더 빨라지고 터프해진 유럽 축구에서 살아남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아인트호벤의 한국 선수들을 평가해 달라. 이천수도 데려오려 한다는데….

“이영표는 적응기간이 필요 없었을 정도로 놀라운 선수다. 박지성은 부상 때문에 고생했으나 회복했다. 두 선수 모두 팀 기여도가 크다. 이천수는 이영표와 같은 조건으로 데려오려 한다. 결정은 이천수와 소속팀에 달렸다.”

―‘진공 청소기’ 김남일은 왜 네덜란드 무대에서 통하지 못했나.

“김남일보다는 팀이 문제였다. 김남일의 소속팀인 엑셀시오르는 1부 리그에 있으나 2류 팀이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운 팀이다. 결코 김남일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어디를 가장 가보고 싶은가.

“서울과 제주도다.”

―당신은 한국의 명예국민이기도 하다. 제주도 전원주택을 선물 받은 걸로 아는데 가봤나. 은퇴 후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은 없나.

“다음주에 은퇴하고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웃음) 월드컵 이후 제주도에 가보지 못했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누가 알겠나.”

파안대소하며 인터뷰를 끝냈지만 히딩크 감독은 분명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 태극전사들이 이룬 엄청난 성과,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한국 국민의 시선을 버거워하는 것도 같았다. 문득 이제 그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냥 놓아 주기에는 그는 너무 많은 걸 우리에게 남겼다.

아인트호벤(네덜란드)=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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