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아듀 ‘2002스포츠’<9>손기정옹 별세

  • 입력 2002년 12월 29일 17시 58분


한국마라톤엔 ‘얼’이 흐른다.

일제강점기 아래 고 손기정옹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마라톤 우승, 그리고 이 사실을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 그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손옹은 생전에 늘 “나라없는 백성은 개와 같다”며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 했던 한을 되뇌었다.

이런 의미에서 손옹의 별세는 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손옹은 11월15일 0시40분 삼성서울병원에서 9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손옹은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나 1932년 제2회동아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며 일약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이로 인해 양정고보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이듬해 제3회 동아마라톤에서 당시 1인자였던 유해붕을 27초차로 누르고 우승하며 조선 최고의 마라토너로 자리매김했다.

손옹은 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해 시상식에 섰을 때 물끄러미 땅만 내려다 봤다. 그는 훗날 “올림픽에서 우승선수의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가 연주되는 것을 알았다면 난 결코 베를린올림픽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생 ‘마라톤’과 ’조국‘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들 정인(59)씨는 “항상 밖에서 선수들만 챙기시느라 우리 남매(누나 문영씨와 정인씨)에겐 무뚝뚝한 아버지였다”고 회고했다.

동아일보 1936년 8월25일자에 실린 일장기가 지워진 시상대 위의 손기정옹 사진. 손옹의 시선은 땅만 내려다 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손옹은 마지막까지 한국마라톤에 대한 걱정을 했다. 그러면서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의 조기 은퇴를 애석해 했다. 황영조라면 올림픽 3연패도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는 늘 한국마라톤의 미래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황영조 이봉주까지는 괜찮은데 다음이 없단 말야. 난 배가 고파 못뛰었지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야. 조금만 배가 부르면 뛰지 않으려고 한단 말이야. 1등 해본 사람도 처음으로 돌아가야 다시 1등을 할 수 있는 법인데…”

황영조(32·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는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우승하자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우리 후배들이 그분의 얼과 뜻을 잘 이어가야 할텐데 참으로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

김화성기자 mars@donga.com

●손기정옹 말·말·말

▽이기고 나니 기쁨보다 알지 못할 설움이 복받쳐 오르며 울음만 나옵니다-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 우승 후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무엇이요. 그렇게 너무 추켜 세우지 마소. 무엇이 그렇게 굉장하다 그러시오-1936년 8월9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기자가 ‘신문사마다 호외를 발행했고 우승을 축하하는 소리가 방방곡곡에 높다’고 하자

▽조국땅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달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1945년 광복 직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태극기를 든 기수로 참가해 눈물을 흘리며

▽(황)영조야, 일본에는 결코 져서는 안된다-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출전에 앞서 황영조에게

▽아무리 아파도 내 다리만은 결코 자를 수 없다-2001년 서울삼성병원 입원치료중 의료진이 ‘최악의 경우 발을 절단해야할 지 모른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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