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적 美에 지다니…” 멕시코, ‘축구전쟁’ 패하자 통한의 눈물

  • 입력 2002년 6월 17일 18시 23분


미국-멕시코전을 보러 온 양팀 응원단 - 변영욱기자
미국-멕시코전을 보러 온 양팀 응원단 - 변영욱기자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잠들어 있을 17일 오전 1시반 수백만명의 멕시코인들은 눈을 부릅뜨고 미국과의 월드컵 16강전을 지켜보았다. 미국이 축구를 골프보다 못한 스포츠로 간주할 때 축구는 멕시코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운명은 멕시코에 심술을 부렸다. 멕시코가 미국에 0-2로 패하자 멕시코시티의 한 스포츠 카페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던 호세 루이스 루비아노(21)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여기가 너무나 아프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눈물이 흐르면서 그의 뺨 위에 그려 놓은 멕시코 국기가 얼룩덜룩 지워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쥐나 바보 취급을 받아왔던 굴욕감을 끝냈어야 했는데…”라며 울먹였다.

루비아노씨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새벽까지 문을 연 멕시코시티의 카페와 식당 수천 곳에 모인 시민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도 이 경기를 함께 보기 위해 각료들을 대통령 관저로 소집했다. 폭스 대통령은 상심한 국민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싸우는 것, 굴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멕시코에 미국전은 ‘전쟁’이었다. 멕시코시티의 일간지 ‘리포마’는 경기 전날인 16일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전쟁이다!”를 뽑았다. 또다른 일간지 ‘라 조르나다’의 시사만화에는 “우리는 그들(미국)에게 캘리포니아와 물과 기름과 경제와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들이 최소한 월요일 경기만큼은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해주세요”라고 무릎꿇고 기도하는 인물이 묘사돼 있었다.

미국에 대한 멕시코인의 적대감은 영토의 절반을 미국에 빼앗긴 ‘멕시코 전쟁’(1846∼1848)에서 시작됐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텍사스주가 이때 빼앗긴 땅이다. 지금은 이곳에 미국의 허가 없이 들어가면 불법이민자다.

따라서 ‘축구만은 미국에 질 수 없다’는 것이 멕시코인들의 정서. 경기 전 설문조사에서 멕시코 응답자의 92%가 승리를 장담했다.

경기 후 멕시코시티 주재 미국대사관이 인접한 독립기념탑 광장에는 차량 진입이 금지됐고 경찰 수천명이 삼엄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대사관 주변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제프리 데비 멕시코 주재 미국대사는 경기 당일 폭도들의 공격을 우려, 대사관 문을 닫았다.

그러나 폭동이나 난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멕시코 국기를 들고 독립기념탑 주위에 모여 있던 소수의 축구팬들이 힘없이 집으로 향했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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