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는 돈-받는 돈’ 숫자 다 빠져… 정부, 국민연금 개혁안 ‘맹탕’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8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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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료율 인상 불가피” 밝히고도
언제-어떻게 올릴지 구체방안 없어
‘연령별 인상속도 차등화’만 제시
“개혁 미룰수록 미래세대 부담 커져”

정부가 국민연금의 ‘내는 돈’인 보험료율과 ‘받는 돈’인 소득대체율에 대한 구체적인 조정 방안이 빠진 개혁안을 발표했다. 특히 연금개혁 핵심인 보험료율 인상에 관한 숫자 없이 ‘연령별로 인상 속도를 다르게 하겠다’는 방향성만 제시했다. 연금개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내년 4월 총선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보건복지부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민연금심의위원회를 열고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확정했다. 국민연금법에 따라 정부는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수지를 계산해 재정 전망과 보험료 조정, 기금 운영계획 등이 포함된 종합운영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국민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계획안에) 보험료율(현행 9%)과 소득대체율(현행 40%)에 대해서 확정적인 수치는 포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 장관은 이어 “전문가, 경영계와 노동계, 세대별 의견이 다양한 만큼 특정안을 제시하기보다 공론화 과정을 통해 폭넓은 논의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앞선 19일 정부 자문기구인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보험료율 인상(12∼18%) △소득대체율 인상(45∼50%)에 따른 재정 전망 △수급 개시 연령 상향(66∼68세) 등을 담은 최종 보고서를 복지부에 제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가 ‘단일안’을 결정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컸다. 이전 정부도 2018년 국회에 4개의 정부안을 제출하면서 연금개혁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날 보험료율 인상의 필요성을 인정했을 뿐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인상할지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조 장관은 “세대 간 형평성을 고려해서 인상 속도를 연령에 따라 차등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출범부터 1년 3개월간 이어온 개혁 논의가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저출산 고령화로 국민연금 고갈 시계가 빨라진 상황에서, 정부마다 연금개혁을 ‘폭탄 돌리듯’ 미뤄 온 탓에 재정은 악화되고 있다. 3월 발표된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의 제5차 재정계산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현행대로 유지될 경우 연기금은 2041년부터 적자로 돌아선 뒤 2055년 고갈되는 것으로 예측됐다. 4차 추계(2018년)보다 2년 앞당겨진 수치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연금개혁을 미룰수록 미래 세대의 부담이 커짐에도 정부는 가장 핵심인 보험료율조차 빠진 무책임하고 우려스러운 개편안을 내놨다”고 말했다.

“연금 ‘내는 돈’, 청년은 천천히-중장년 빨리 인상”… 로드맵은 없어


[국민연금 개편안]
정부 개혁안 ‘맹탕’
청년 20년-중년 5년간 인상 등 거론
경제상황 따라 연금 자동조정 검토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연금개혁의 핵심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에 대한 구체적인 조정 방안이 빠진 이번 정부 개혁안에 대해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연금개혁의 핵심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에 대한 구체적인 조정 방안이 빠진 이번 정부 개혁안에 대해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정부는 27일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발표하면서 “국민연금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금개혁의 핵심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뿐만 아니라 연금을 ‘받는 나이’인 수급 개시 연령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조정 방안을 발표하지 않았다.

정부는 “수급 개시 연령 조정은 은퇴 후 소득 공백 확대를 감안해서 ‘고령자 계속고용 여건이 성숙된 이후’ 논의한다”고만 밝혔다. 시민단체인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은 이날 논평을 내고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만 반복되는 맹탕 개혁안”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현재 65세인 수급 개시 연령을 66세, 67세, 68세로 늦추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 보험료, 청년층 천천히-중장년층 빨리 인상

정부는 이날 구체적인 보험료율 인상 수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인상 속도를 ‘세대별로 다르게’ 적용하겠다는 방향성을 발표했다. 보험료율을 청년층에서는 천천히, 중장년층에서는 빠르게 올린다는 계획이다.

예를 들어 현재 9%인 보험료율을 앞으로 14%까지 5%포인트 올린다고 가정하면, 20대와 30대는 15∼20년에 걸쳐 인상하고 40대와 50대는 5년에 걸쳐 인상하는 식이라고 복지부는 설명했다. 이스란 복지부 연금정책관은 “집단심층면접(FGI)에서 청년들이 ‘우리는 많이 내고 덜 받는데, 기성세대는 조금 내고 많이 받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며 “보험료율 인상 속도를 차등화하는 것이 세대별 형평성과 공정성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연령대에서, 인상 속도에 얼마나 차이를 둘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윤순 복지부 사회복지정책실장은 “세대 간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공론화 과정에서 구체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등 인상이 확정되면, 청년층보다 더 높은 보험료율이 적용되는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반발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보험료율 조정에 있어서 정부가 속도를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금 상황에서는 보험료율에 대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 ‘일하는 노인’ 연금 안 깎는다

정부는 이날 “‘자동안정화 장치’ 도입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평균수명이나 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연금액이 자동으로 조정되도록 하는 장치로,일부 전문가가 재정안정화를 위해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독일, 프랑스 등은 자동안정화 장치를 통해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연금액을 자동으로 삭감하고 있다.

이번 정부 개편안에는 국민연금 가입자의 노후 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들도 일부 담겼다. 먼저 ‘연금 감액 제도’ 폐지가 추진된다. 지금까지 연금 수급자는 월 소득이 286만 원(올해 기준)을 넘으면 연금액이 일부 깎였다. 이 때문에 ‘일하는 노인’이 손해를 본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이 제도를 폐지하기로 한 것.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도 확대한다. 현재 지원 대상은 실업, 휴직 등으로 국민연금 납부 예외자가 됐다가 다시 납부를 재개하는 사람에 한정된다. 앞으로는 여기에 저소득 지역가입자를 추가하기로 했다. 현재 60세 미만인 의무가입 연령을 수급 개시 연령(65세)에 순차적으로 일치시키는 방안도 추진된다.

● “연금 지급 보장, 법으로 명시 추진”

정부는 국민연금 지급을 법으로 보장하는 ‘지급 보장 명문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미래에 기금이 고갈되면 연금을 받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청년층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다. 이 연금정책관은 “구체적인 문구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국회와 논의할 때 국가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녀를 낳거나 군 복무를 하면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추가로 인정해 주는 ‘크레디트 제도’도 개선된다. 현재 출산 크레디트의 경우 둘째 아이는 12개월, 셋째 아이부터 18개월의 가입 기간이 인정된다. 앞으로는 첫째 아이부터 12개월씩 가입 기간을 인정하기로 했다. 군 복무 크레디트도 현재 복무 기간 중 6개월만 인정해 주는 것을 전체 복무 기간(18∼21개월)으로 늘린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내는 돈#받는 돈#정부#국민연금 개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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