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혈 막은 손이 덜덜덜”…서현역 ‘소년 의인’들에게 길었던 시간 [따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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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8월 24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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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역 흉기 난동 피해자 지혈한 윤도일·음준 군
“살면서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끔찍”
“119 도착하기까지 길게만 느껴져”


그날 서현역에서 두 소년이 마주한 장면은 이제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본 가장 끔찍한 모습이었다.

지난 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AK프라자에서 일어난 ‘무차별 흉기난동’ 사건 때 가장 먼저 피해자 응급조치를 했던 ‘소년 의인’ 윤도일 군(17)과 음준 군(18)을 최근 서현역 인근에서 만났다.

“도일아 지혈해! 난 범인 오나 살필게”
(사진=독자제공. 뉴스1)
(사진=독자제공. 뉴스1)

그날 두 소년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윤 군과 음 군, 그리고 여학생 친구 한 명이 더 있었다. 셋이 프라자 1층을 걷고 있는데 돌연 뒤에서 비명이 나며 사람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젊은 여성 1명과 남성 1명이 쓰러져 있고 피가 흘러 아수라장이었다.

두 학생은 여성 친구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친 후 정작 본인들은 피신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피해 여성은 이미 의식이 희미해져 지혈하던 손을 놓아버렸다.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일아 지혈해 난 범인 오나 살필게.” 음 군이 망을 보는 사이 윤 군은 최대한 피가 나오지 않도록 여성의 자상 부위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또 다른 피해 남성은 백화점 보안직원들이 도왔다.

윤 군은 두려웠다. “출혈 부위를 막은 양손이 덜덜덜 떨렸어요. 범인이 돌아올까 봐 떨렸기 보다는 그냥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웠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소방관이 “이제 손떼도 돼” 말할 때까지 그 자리에…

두 학생은 119대원들이 도착해 “이제 손을 떼도 된다”고 말할 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고 쓰러진 여성 곁을 지켰다. ‘정확히 몇 분 동안 이었냐?’고 묻자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어요”라고 답했다.

윤 군은 “지혈하고 있는 동안에 범인이 다시 돌아왔는지 경찰들이 쫓아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는데 달리기가 엄청 빨랐어요”라고 떠올렸다.

여성의 부상 정도에 대해선 “내가 살면서 지금까지 본 상처 중에 가장 끔찍한 상태였어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해 여성은 크게 다쳤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날 밤 엄마에게 크게 혼나”

그날 윤 군은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크게 혼났다. 어머니는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랬냐”며 꾸중했다. 가슴 철렁 했던 어머니의 당연한 반응이다. 이에 윤 군은 “엄마 나 안 다쳤으니 그냥 잘했다고 칭찬 한번 해주면 안 돼?”라고 응석 부렸다고 한다.

윤 군은 평소 잠이 많고 조용한 편이지만 누군가 행패 부리는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호기심 많은 성격도 이런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나선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년 전 길거리에서 취객이 소주병을 들고 시민들을 위협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때 고작 중 3이었던 윤 군이 나서서 소주병을 빼앗고 경찰에 신고해 상황을 정리했다.

음 군 역시 아는 동생들의 시비 현장을 진화한 경험이 있다. 1년 전쯤에 길을 가는데 술 취한 노인이 일행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다른 아이들은 노인과 싸우려 들었지만 음 군이 나서서 “나이 드신 할아버지에게 그러지 말아라”라며 동생들을 말려 사건이 커지지 않도록 진화했다.

“같은 상황 또 벌어지면 그때도 주저 없이”

윤 군과 음 군은 중학교 동창 사이다.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했지만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는 절친이다. 여느 10대들처럼 장난치고 투닥거리지만 다른 친구들이 목숨 걸린 일을 두고 장난 칠 때면 단호하게 화를 낸다고 말했다.

이들의 용감함에 기자가 감탄하자 윤 군은 “저 솔직히 싸움 잘해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한 살 많은 음 군이 깔깔깔 웃으며 “네가 싸움을 잘한다고? 웃긴다”라며 놀렸다. ‘싸움 잘하면 친구들 괴롭힌 적은 없냐?’고 묻자 둘다 손을 내저으며 “오 그런 짓은 절대 안 해요. 오히려 어떤 친구가 애들 돈 뺏는 현장 목격하고 다시 뺏어서 돌려준 적은 있어요”라고 답했다.

윤 군은 “사실 다른 분들께는 서현역 사건처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며 “하지만 저는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면 그때도 주저 없이 피해자를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음 군은 현재 고3으로 대학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학교 다니면서도 미용실에서 일하며 스스로 돈을 벌어 왔다는 윤 군은 훌륭한 미용 사업가로 꿈을 펼치고 싶다고 장래 희망을 밝혔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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