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들이 한 일, 국가와 지자체가 할 일[디지털 동서남북]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28일 17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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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사회부에는 20여 명의 전국팀 기자들이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지역의 생생한 목소리를 찾기 위해 뛰고 있습니다. 전국팀 전용칼럼 <동서남북>은 2000년대 초반부터 독자들에게 깊이있는 시각을 전달해온 대표 컨텐츠 입니다. 이제 좁은 지면을 벗어나 더 자주, 자유롭게 생생한 지역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디지털 동서남북>으로 확장해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지면에 담지 못한 뒷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은 따뜻한 이야기 등 뉴스의 이면을 쉽고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편집자주
기자는 이달 16~23일 집중호우와 산사태로 큰 피해를 입은 경북 예천군에 머물며 취재 활동을 했다. 눈으로 본 수해 현장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산사태의 직격을 맞은 마을들은 길이 완전히 끊겨 응급복구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을 안에선 평생 지냈던 삶의 터전이 흔적조차 사라진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18일 경북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에서 소방당국이 중장비를 이용해 실종자를 수색하고 있다. 예천=도영진 기자 0jin2@donga.com


● “이런 재난은 살다 처음” 슬픔에 잠긴 주민들
기자가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살면서 이런 재난은 처음 본다”고 입을 모았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이재민들에게는 말을 건네는 것 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연 이재민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한 주민은 토사에 매몰된 아내를 간신히 찾아 심폐소생술을 하며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숨진 이야기를 전하다 끝내 입술을 깨물었다. 간신히 찾아간 집은 흔적조차 없고 농기계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걸 보며 털썩 주저 앉은 주민은 원망할 기운조차 잃은 듯 했다. 위로의 말을 건네긴 했지만, 이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위로가 됐을지 기자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진정성’ 있게 다가가야
갑작스런 재난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뭘까.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2014년 세월호 참사, 2017년 포항 지진, 지난해 태풍 힌남노 피해 등 국내에서 발생한 대규모 재난 현장에서 피해자들의 심리 치료를 담당했던 이영렬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은 기자에게 “피해자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두 가지”라고 말했다.

하나는 ‘진정성’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해를 많이 입으신 분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세요. 그분들 입장에서 헤아리고 진심을 다 하는 건 ‘편안하시냐’ ‘잘 지내시라’ 이런 말이 아니예요. 입고 있는 옷을 벗어주고, 먹던 음식을 같이 나눠 먹는 행동이 중요해요. 그게 바로 진정성입니다.”

생각해보니 이 센터장의 말처럼 현장에서 진정성을 갖고 자신의 것을 나누던 이들이 떠 올랐다. 바로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예천군민들이었다.

19일 오후 경북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의 한 카페 입구에 ‘수해복구 관련 군인 소방 경찰 공무원분들께 아메리카노를 무상 제공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예천=도영진 0jin2@donga.com

예천읍에서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김갑연 씨(69)는 산사태로 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돌아갈 곳이 없다는 80대 노부부를 부축해 방까지 안내하고 숙박을 무료로 제공했다. 김 씨는 기자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살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어떻게 돈을 받겠느냐”고 했다.

그는 산사태 피해를 입고 끼니도 거른 채 모텔로 온 일가족 4명에게도 무료로 방을 내주고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이 소식이 도움을 받은 이들을 통해 알려지자 오히려 “별로 큰 일 한 것도 아닌데 부끄럽다”고 했다.

산사태가 덮친 효자면 백석리에선 가족과 이웃을 잃은 상백(上白)마을 주민들을 위해 하백(下白)마을 주민들이 매끼 수십 인분의 밥상을 차렸다. 하백마을 주민 또한 오가는 도로가 끊긴 피해자였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십시일반 재료를 가져오고 음식을 만들었다.

또 감천면 천향2리 주민 30여 명은 산사태로 집을 잃은 이장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수해 복구작업에 나섰다. 밤새 울기만 하고 잠도 못 잤던 이장 내외는 마을 주민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기자가 언급한 분들 외에도 많은 분들이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분들의 진정성 덕분에 피해자와 이재민들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기자는 손을 내민 분들 모두가 진정한 히어로라고 생각한다.

16일 이재민 임시주거시설인 경북 예천군 벌방리 노인복지회관에서 생활 중인 주민이 회관 밖으로 나서고 있다. 예천=도영진 0jin2@donga.com


● 더욱 필요한 건 ‘안심’
이번 폭우와 산사태에서 알 수 있듯 기후변화로 자연재해는 최근 전례없는 수준이다 .

그런데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대응은 미흡하기만 했다. 일례로 경북 산간 지역은 경사가 가파른 데다 모래 성분이 많은 마사토 지역이라 폭우 시 산사태로 이어질 위험이 컸다. 그럼에도 산사태가 난 10개 마을 가운데 단 1곳만 산사태 취약지역으로 지정돼 있었다. 또 이번 폭우로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북 지역 마을 14곳은 모두 지자체가 지정하는 ‘재해 위험 지구’로 분류돼 있지 않았다.

이 센터장은 진정성에 이어 두 번째로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안심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피해를 입 주민들이 가장 먼저 한은 ‘내년엔 괜찮을까요’ 였습니다. 이번에 피해를 겪은 분들도 ‘우리가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도 될까’ 불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어요. 구호활동이 끝나고 예천에 왔던 봉사자들이 떠난 후에도, 남은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기후변화로 앞으로 이런 재해는 계속 생길 수 있거든요.
산사태로 갈 곳을 잃은 경북 예천 피해자들의 마음을 다독인 이들은 “이럴 때 돕고 사는 것”이라며 나선 이웃들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안심하게 사셔도 된다”며 피해자들을 안심시킬 주체는 국가와 지자체여야 한다.

마침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재난관리체계를 사후 수습에서 예방 중심으로 전환하고, 과거 수십년이 아닌 최근 5년 기준으로 매뉴얼을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그 말대로 국가와 지자체의 재난대비가 충실히 이뤄져 피해자들이 안심할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란다.

예천=도영진 기자 0ji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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