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로 이뤄가는 탈북 여사장의 꿈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3일 10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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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정 해숨 대표가 가평에 위치한 자신의 황태덕장에서 말린 명태를 들어보이고 있다.

3일째 굶었더니 하늘이 노랬다. 8월 초 삼복더위에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방에서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김도정 씨가 하나원을 나와 서울 양천의 한 임대주택에 도착한 것은 닷새 전인 8월 3일. 하나원에서 나올 때 초기 정착지원금 300만 원이 든 통장을 받았다.

아파트에 도착해 보증금 20만 원을 내고 집에 올라왔다. 17평 임대아파트를 둘러보고 드디어 이렇게 큰 내 집이 생겼다고 기뻐한 것도 잠깐. 어떻게 알았는지 탈북 브로커가 제일 먼저 집에 찾아왔다.

브로커는 그를 차에 태우고 근처 은행에 가서 통장에 든 280만 원을 다 빼서 받은 뒤 사라졌다. 서울 생활 첫째 날에 은행에 홀로 남겨진 그는 당황했다. 차를 타고 오다보니 집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중에는 돈도 없었다.

거리를 헤매는데 밤이 어두워졌다. 길거리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정착도우미에게 연락을 했더니 그가 와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서울에 도착한 날과 다음 날은 정착 교육을 시킨다며 복지관에 데려가 점심은 먹여주었다. 그리고 3일째부터 그는 홀로 남겨졌다.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돈을 빌릴 수도 없었다. 외롭게 남겨진 방에서 그는 울다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살다간 죽겠다싶어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밖으로 나섰다. 일자리를 구해야겠다 싶어 가까운 아무 식당이나 찾아 나섰다. 닷새 동안 두 끼만 먹은 터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겨우 한 식당을 찾아 들어가 일자리가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밖으로 나가 이제 어디로 또 가야 할지 막막해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돌아보니 태어나 33년 동안 이렇게 굶은 적은 처음이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도 겪었고, 중국에서도 10년을 배고프지 않고 살았는데, 한국 사회에 나와 3일이나 굶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공교롭게 그는 ‘단식투쟁’을 통해 한국에 왔다. 2007년 4월 한국 언론에는 태국 수용시설에 수감된 탈북자들이 집단 단식투쟁에 돌입했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100명 정도 수감될 수 있는 방에 340명의 여성 탈북자들이 수감돼 화장실에서까지 잠을 자야 했는데 한국행이 계속 늦춰져서 결국 단식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감옥에서 주는 밥만 받지 않았을 뿐, 실은 그 전에 미리 먹을 것을 숨겨두어 많이 굶지는 않았다. 단식투쟁 주도자 중 한 명인 도정 씨는 그 일로 미움을 받았는지 감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늦게 한국에 왔다.

다른 식당을 찾아가는데 마침 정착도우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의 사정을 듣더니 어느 고깃집 알바 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식당에 간 저녁 도정 씨는 서울에서의 세 번째 식사를 했다. 그날이 2007년 8월 7일이었다.
여자축구선수였던 학창시절

김도정 씨는 1974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60년대 초반 군에서 1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오진우의 차도 몰았던 적이 있지만, 행방불명된 형 때문에 결국 군복을 벗고 고향인 경성으로 돌아왔다.

형님은 6.25전쟁 전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전쟁 때에는 모스크바와 독일로 다시 옮겨가 공부했다. 그러다가 1959년에 사라졌는데 서독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훗날 도정이 탈북하려 했을 때 부친은 딸에게 부탁했다.

“내 형님의 이름은 김상봉이고, 1935년생이야. 서독에 가서 성공했다는 말이 있던데 네가 가서 꼭 찾아봐라.” 탈북한지 25년이 넘었지만 아직 도정은 큰아버지를 찾지 못했다.

도정은 축구와 함께 학생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갔을 때 도에 4개만 있는 축구구락부가 경성에 생겼다. 신체조건이 또래보다 훌륭했던 도정은 여자 축구선수로 선발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경성역 앞 공원에 나가 6시 반까지 훈련을 하고, 8시에 등교했다가 오후에 다시 공을 차는 일상이 5년 동안 반복됐다.

당시 북한은 여자축구에 큰 힘을 쏟고 있던 터라 그는 남들이 다 가는 농촌지원을 가지 않고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전지훈련이나 시합을 나갈 때엔 학교에서도 한 달쯤 나오지 않아도 눈을 감아주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프로 입문 시점이 다가오자 도정은 진로를 바꾸었다. 먼저 프로선수가 된 선배들이 해외 경기에 나가 지고 오면 노동단련대로 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군에 나가 노동당원이 된 뒤 장교가 되려고 결심했다.

1991년 중학교 졸업과 함께 그는 도 군사동원부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는 등 입대 절차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만 그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불행이 찾아왔다. 도정의 아래엔 학생인 남동생이 셋이나 있었고, 어머니도 건강하지 못했다. 그는 군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집에 남았다.

당국이 배정한 그의 첫 직장은 아버지가 뇌출혈 전에 다녔던 경성의 종자농장 노동자였다. 종자농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협동농장과 달리 농민 성분이 아닌 노동자 성분이었다. 노동자들처럼 매월 배급과 월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하는 일은 농민과 별 다름이 없었다.

농장에 첫 출근을 하게 된 날 도정은 볏단 속에 들어가 엉엉 울었다. 자신의 인생이 농사를 짓다가 끝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억척스럽게 다시 일어났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불행하더라도 그 환경 안에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하다보니 청년위원장도 됐고 선동원이란 직책도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찾아와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다행히 종자농장은 그럭저럭 배급은 보장해주어 가족이 굶어죽을 형편은 되지 않았지만 살림은 나날이 어려워졌다.

2007년 5월 하나원에 막 들어갔을 때의 김도정 대표.
사상 교육을 받으며 꿈꾼 탈북

1996년 10월 어느 날 친구의 언니가 찾아와 “새별에 선보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북한은 선을 보러 남자들이 가지 여성들이 먼저 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함북 새별군은 아오지 탄광이 있는 두만강 옆 지역으로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을 가야 했다. 도정은 이미 그 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그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중국에 시집가지 않겠냐는 말이었던 것이었다.

도정은 고민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살. 25살만 넘기면 노처녀란 말을 듣던 북한에서 그는 몇 년 안에 농장의 어느 남자를 만나 결혼할 운명이었다.

북한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 사는 인생을 떠올리니 막막했다. 반면 2년 전 봤던 불빛이 환한 중국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1994년 초 도정은 전국 왕재산답사단에 선발됐다. 왕재산은 북한의 유명한 혁명전적지인데, 1933년에 김일성이 건너와 항일무장투쟁을 국내로 확대시키는 전략을 제시한 ‘왕재산회의’를 열었다는 곳이다. 한국에서 왕재산은 2011년 적발된 간첩단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도정은 전국에서 200명을 선발하는 답사단에 경성군에서 유일하게 선발됐다. 농장 청년위원장으로 열심히 일한다고 당에서 인정해준 것이다.

전국에서 모인 답사단은 함북 회령의 김정숙 동상 앞에 모여 충성 맹세를 다진 뒤 온성군에 있는 왕재산까지 며칠 동안 걸어서 행군했다. 회령에서 왕재산까지 가는 길옆으로 두만강이 흘렀다.

도정은 그때 두만강을 처음 봤다. 책에서 배울 때는 아주 넓은 줄 알았는데 좁은 곳도 많았다. 중국이 이렇게 가까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보이는 중국은 어두운 북한과 달리 불이 훤했다. 낮에 건너다 봐도 모든 것이 풍족해보였고 잘 사는 곳 같았다.

북한 당국은 청년들에게 사상교육을 시키기 위해 혁명전적지 답사단을 만들었는데, 도정은 이 답사 기간에 중국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그런데 2년 뒤 중국으로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미래가 없는 이 땅을 떠나 중국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종성까지 갔다. 맞은편은 중국 투먼(圖們)이었다. 열흘 쯤 현지에 머무르다가 브로커의 안내를 따라 강을 넘었고, 얼마 뒤 투먼에 사는 조선족 남성을 소개받았다. 국경 도시인 투먼은 경계가 삼엄했다. 그래서 그는 남자와 함께 이듬해인 1997년 연길로 들어갔다.
단식투쟁 끝에 도착한 한국
중국에서 만난 남자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북한 가족에게 보내줘야 하는 도정은 허무하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탈북한 이듬해 23살 때부터 그는 연길 중심의 서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고사리를 삶아 팔았고, 더덕과 완두 장사도 했다. 말을 배우지 못해 한족은 멀리하고 조선족이 자주 찾는 식품 위주로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면서 점차 서시장의 상인이 돼갔다.

그러다가 점차 시장에 적응하면서 김치를 전문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1999년 아들이 태어났다. 세 식구를 먹여 살리면서 북한 가족에게 돈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암울했다. 그가 탈북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뇌출혈이 재발해 쓰러졌다.

도정은 중국에서 상품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냈는데, 언니의 남편이 이것을 보고 처제가 탈북했다고 안전부에 가서 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끌려가 20일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던 끝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언니는 이혼을 했다.

북한에선 돈 쓸 일이 계속 생겨나는데, 중국에서 체포될까봐 조심히 장사해서는 돈을 크게 벌수가 없었다. 그나마 행운이었던 것은 연길의 중심시장에서 10년이나 신분을 숨기고 장사를 했지만 한 번도 체포돼 북송된 일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돈을 주고 북한 여성을 사서 그 덕으로 먹고 살려는 남자와 결별하고 싶었지만 아이 때문에 선뜻 떠날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음속엔 한국에 대한 동경이 생겨났다. 조선족들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가는 방법을 몰랐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다른 곳에 살던 5촌 여조카가 먼저 한국으로 간 것이다. 그는 조카가 탈북한 줄도 몰랐는데, 한국으로 간 그가 우연히 도정이 연길에 사는 것을 알고 연락해왔다.

그의 소개로 그는 한국으로 오는 선을 알았고, 주저 없이 집을 떠났다. 중국을 횡단해 태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앞서 태국에 온 탈북민들은 한 달반이면 재판 절차를 마치고 한국으로 갔는데, 도정이 태국에 왔을 때는 4개월 반을 기다려도 뽑지 않았다.

그 사이 감옥은 탈북자들로 넘쳐났다. 100명을 수감할 수 있는 공간에 340명이 선풍기도 없이 견뎌야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탈북자들은 단식이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 전에 감옥 내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미리 숨기고 감옥에서 주는 밥을 거절했다.

며칠 지나자 태국 탈북자들이 단식투쟁을 한다는 뉴스가 한국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제야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서두르기 시작해 몇 십 명 단위로 한국으로 데려갔다.

주모자로 몰린 도정은 다른 곳으로 끌려가 20일 넘게 더 격리돼 있다가 2007년 5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8월 사회에 나왔다. 하나원 같은 기수 100명 중 20명만 받을 수 있었던 서울에도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굶주림이었다.
열흘 만에 쫓겨난 첫 알바

서울 생활은 녹녹치 않았다. 시급 5000원을 받기로 하고 닷새 만에 자리를 얻은 식당에선 열흘 만에 쫓겨났다. 식당 사장은 70세가 넘은 홀로 사는 노인이었는데, 며칠 지나자 자기 집에 가서 빨래를 하라고 시켰다. 한국 생활을 모르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거절했다. 두 번째도 거절하자 식당 사장이 배은망덕하다며 더 나오지 말라고 했다.

얼마 뒤 탈북자 지원센터가 소개해 준 휴대전화 조립회사에 다른 탈북자 3명과 함께 취직했다. 하지만 그는 한 달반을 일하고 퇴사했다.

하나원에선 사회에 나가면 150만 원은 번다고 교육했는데, 당시 회사에서 준 월급이 85만 원이었다. 첫 월급을 받고 계산해보니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당시 탈북민은 한국 정착 초기 6개월 동안은 월 38만 원이라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았고, 의료보험 1종 혜택도 받았다. 취직하면 그 모든 혜택이 사라진다. 그걸 감수하면서 하루 빨리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취직했는데, 4대 보험과 임대아파트 관리비 등을 내고 나니 열심히 일한 보람이 거의 없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은 끝에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환풍기 조립업체에 취직했다. 양천구에서 화성까지 출근하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 매일 6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수원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회사까지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월급이 170만 원이라 더 좋은 직업을 찾을 수가 없어 3년 반이나 다녔다.

직장에 다니는 과정에 그는 다섯 살 연상의 남자도 만나 결혼했고 딸도 두 명 태어났다. 2009년 중국에서 아들도 데려왔다.

남편은 한국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하게 알게 됐다. 남편은 예전에 건설 관련 개인 사업을 했는데, 어느 날 인명 피해가 발생한 큰 사고가 터졌다. 그는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피해 보상으로 내놓고 노숙까지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친구와 함께 고물상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1톤 화물트럭을 뽑은 지 20일 째에 도정을 알게 됐다.

서울에 가진 것이란 임대아파트 한 채만 있는 외로운 여자와 1톤 트럭 한 대만 있는 남자는 서로의 처지에 묘하게 끌렸다. 결국 서로 의지해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약속하고 살림을 합쳤다.

2009년 첫 딸이 태어났을 때 중국에서 데려온 10살 위의 아들이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면서 사실상 여동생의 보육을 맡았다. 2010년에 둘째 딸도 태어났다. 도정은 둘째를 낳고 반년쯤 회사를 더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아침 6시에 나가 밤 10시에 들어오는 일과를 하면서 애기 둘을 키우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애를 키우면서 돈을 벌 일은 찾아야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명태를 말려서 파는 일이었다.

2015년 1월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정착사례를 발표하고 있는 김도정 대표.
2015년 1월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정착사례를 발표하고 있는 김도정 대표.
# 3년 연속 망한 명태사업

명태 사업은 우연히 시작했다. 동해 바다 옆에서 자란 도정은 어렸을 때 많이 먹었던 황태 맛이 늘 그리웠다. 그런데 한국에서 파는 황태는 입에 맞지 않았다.

그는 처음 본인이 먹으려고 경기도 가평에 있는 시댁 마당에 명태를 사서 말렸다. 주변에 나눠주니 모두 맛있다고 했다. 기회도 찾아왔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진 뒤 한국 정부는 북한과의 모든 교류를 중단했다. 북한산 수산물 수입도 막혔다. 북한에서 말린 황태를 수입해 한국에 팔던 사람들도 장사를 포기해야 했다.

그중에서 도정이 말려 나눠준 황태를 먹어봤던 몇 명이 명태를 사서 말려달라고 제안했다. 도정은 부산에서 동태를 구입해 말린 뒤 그들에게 갖다 주었다. 직장을 다니며 번 돈과 황태를 팔아 번 돈을 모아 집 주변에 작은 식당도 열었다. 명태를 말릴 수가 없는 여름에는 식당에서 장사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음식점은 잘 되지 않았다. 월 임대료 고민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도정은 2015년쯤 황태를 말려 직접 팔기로 결심했다. 큰마음을 먹고 가평에 큰 덕장을 만들고 부산에서 한꺼번에 명태를 22톤이나 사서 널었다. 식당에서 장사를 하고, 장사가 끝난 뒤 늦은 밤에 차를 타고 가평으로 가서 명태를 가공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나 첫해는 완전히 망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 명태가 잘 마르지 않은 것이다. 손이 떨려 차마 썩어가는 명태를 버릴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시부모님들이 며느리 몰래 그 명태를 모두 버렸다.

인생을 포기한 듯 쓰러져 있는 도정에게 시어머니가 소리쳤다.

“당장 일어나. 빈손으로 여기에 와서 학비를 안내고 부자 되는 법은 없다. 돈 버는 일이 그리 쉬우면 한국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을 거다. 네가 쓰러져 있으면 아이들은 누가 키울 거냐.”

시어머니는 그를 일으켜 세우더니 은행으로 데려가 750만 원을 찾아 건네주었다.

“내가 가진 것이 지금까지 부었던 적금이 전부인데, 이 돈을 갖고 다시 해봐라.”

도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가 빈손으로 왔는데 다시 빈손이 됐을 뿐이고, 돈은 이제 또 벌면 되지.”

그는 그 돈으로 이듬해 다시 명태를 사서 널었다. 그러나 또 망했다. 날씨가 또 더워졌고, 명태는 또 썩었다.

세 번째 해에도 오기로 빚을 내 시작했다. 또 망했다. 3년 연속 실패하다보니 빚도 1억8000만 원이나 생겨났다.
황태 말리는 비법을 찾다

하지만 실패가 학비라던 시어머님의 이야기대로, 그 과정에 배운 것도 있었다.

우선 좋은 명태를 고르는 법을 익혔다. 무조건 크다고 좋은 명태가 아니었다. 말렸을 때 살이 가득한 명태는 따로 있었다.

둘째로 씻는 방법을 특화시켰다. 한국의 유명 황태 덕장은 수돗물에 씻었는데, 도정은 소금을 풀어 바닷물 농도로 맞추어 씻었다.

셋째로 말리는 방법을 달리했다. 그때까진 명태는 머리를 꿰어 덕장에 매달아놓는데, 도정은 꼬리를 꿰어 거꾸로 말렸다. 이렇게 하면 소금물이 살에 더 잘 스며들어 쫄깃쫄깃해지고 맛도 좋아졌다.

황태는 눈을 맞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마른다. 그런데 서울 주변에 내리는 눈은 환경오염 물질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는 덕장 위에 천정을 만들고, 더운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선풍기로 찬 바람을 만들었다.

이렇게 노력한 끝에 2018년 처음으로 상품이 나와 매출액 1억 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자신감이 생기니 사업은 탄력이 붙었고, 2020년까지 이전 3년 동안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는 ‘해숨’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해숨청정명태’라는 브랜드로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코로나가 터져도 온라인 매출은 계속 성장했다.

그러나 사업이 늘 평탄할 수는 없었다. 생각지 못한 변수는 늘 있다. 올해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전쟁 발발 후 3개월 동안 매출은 0을 찍었다. 러시아산 명태를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대통령 때문에 장사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장고가 고장 나 보관하고 있던 황태를 버려야 하는 불행도 찾아왔다.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제 그는 더는 낙담만하고 있지 않는다.

“울어봐야 방법이 나오는 것은 아니죠. 저는 이제 어려움이 찾아오면 이건 쉬었다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항상 인생이 좋을 수만 있진 않거든요. 그래도 돌아보면 저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곧 출고할 말린 명태를 들어보이고 있는 김도정 해솜 대표.
다시 세운 인생 목표

2015년 1월 9일 그는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정착사례발표’를 했다. 통일부에서 주관하는 정착사례 경연에 수기를 냈는데 우수상을 받았고, 그걸 계기로 탈북민 대표로 선정돼 신년 통일준비 업무보고 자리에 초대돼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민은 한국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성공입니다. 자유를 찾았으니 그 다음부터는 나의 몫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운이 좋게 10년 동안 북송되지 않았는데, 그것만 해도 축복받은 것이고, 한국에 와서 아내를 믿고 지지해주는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할 일을 찾은 것도 축복받은 일입니다.”

하나원에 들어왔을 때 그는 10년의 계획을 세웠다. “결혼을 해 내편을 만들 것이며, 이 좋은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 키울 것이며, 내 사업을 하겠다”는 3대 목표를 세웠다.

지금 돌아보니 어려움이 참 많았지만 결국 원했던 것은 다 이뤘다. 요즘은 SBS에서 방영하는 ‘골 때리는 그녀들’에 북한팀을 구성해 참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심적 여유도 생겼다. 향후 10년을 그려보면 더 큰 목표도 생겨났다.

우선 첫째 딸을 세계 정상의 태권도 선수로 키우는 것이다. 올해 13살인 딸은 학교 때 씨름선수였던 아버지와 축구선수였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충실히 물려받았는지 벌써 키가 176㎝나 된다. 지난해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전국 태권왕 겨루기 대회에서 우승해 자기 체급 랭킹 1위를 했다. 그러니 세계적 선수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만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태권도 학원과 시합비 등으로 매달 200만원 가까이 들어간다. 올해 매출이 없어 어렵게 되자 12살 된 막내딸이 “제가 피아노를 그만둘 거니 언니를 계속 태권도하게 밀어 주세요”라고 했다. 도정은 막내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

도정은 평소 자식들에게 “부모는 빈손으로 시작해 너희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 너희가 잘 되게 하는데 다 쓸 것이고, 혹 남게 되면 사회에 환원하고 갈 것이니 너희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라”고 교육했다. 그런 철학으로 아들이 군에 갔다 제대한 당일 이제부터 알아서 인생을 개척하라고 아들을 독립시켰다. 하지만 막내딸이 하고 싶어하는 피아노를 돈이 없어 포기하게 만들었을 때엔 자녀들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해 너무 괴로웠다.

두 번째 꿈은 가족과 해외여행을 가보는 것이다. 한국에 정착한지 15년이 됐지만 부부는 아직 해외를 가본 적이 없다.

여행을 갈 돈도 없으면서 그는 설립 10년째 되는 한 탈북민 봉사단의 단장을 4년째 맡아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탈북민이 처음 사회에 나오면 정말 외롭잖아요. 고향의 음식도 너무 그리울 것이고. 그래서 먼저 정착한 탈북민들이 고향 음식을 만들어 새로 온 사람을 찾아가 삶의 의욕을 불어주려고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20여명의 탈북민이 매달 한 번씩 모여 코다리조림이나 명란젓, 김치, 북한식 염장무 반찬 등을 만들어 찾아간다. 음식 만드는 과정에 교류해서 좋고, 음식을 먹으며 탈북민이 기뻐하는 모습을 봐서 또 기분이 좋단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최근 입국하는 탈북민이 급감해 찾아갈 집이 없어졌다. 그래서 봉사단은 요즘 홀로 사는 노인이나 생활이 어려운 지역주민들을 찾아가 북한 음식을 맛보게 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북한에 사시던 부모님들이 이제는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각하면 항상 죄스러운 마음뿐인데, 명절 때마다 한국의 어르신을 찾아가 대접하면 위로가 됩니다.”

그의 세 번째 꿈은 통일이 되면 명태라는 이름이 처음 생겨난 함북 명천에 수산물가공업체를 만드는 것이다. 꼭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통일되면 고향에 가서 부모님 묘에 비석을 세우고 싶어요. 한국에 오니 여긴 묘와 비석이 얼마나 좋은지 감탄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도움을 받은 분들을 큰 버스에 태워 제 고향인 경성에 모시고 가는 겁니다. 경성은 온천으로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좋은 관광거리가 참 많아요. 제가 그땐 관광 가이드를 할 겁니다. 고향 근처에 회사를 만들고 일도 하면서, 부모님 묘소를 방문하고, 다른 사람들 기분 좋게 관광가이드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꿈을 말할 때 그의 얼굴이 가장 빛났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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