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리더여도 되냐’란 물음표,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특별취재팀 입력 2020-11-03 03:00수정 2020-11-0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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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00주년 기획 / 극과 극이 만나다]
2018년 스타트업 입사 오도경 씨 “女임원 늘려도 유리천장 못깨… 인식 달라져야”
1991년 대기업 입사 유세미 씨 “여성인재 육성 첫발 내디딘것… 나비효과 기대”


《5%. 국내에서 자산 2조 원 이상인 상장기업 147곳의 전체 등기임원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임원 100명 가운데 95명이 남성. ‘유리 천장’은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했다.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기획 ‘극과 극이 만나다’는 4번째 주제로 ‘젠더(gender·성) 이슈’를 골랐다. 세부 주제는 여성이사(등기임원) 의무할당제도. 1월 국회에서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기업은 여성 1명 이상을 등기임원으로 선임해야 하는 법안이 통과돼 2022년 8월부터 시행된다. 처벌 규정은 따로 없다. 남녀 갈등이 극심한 한국 사회에서 의무할당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시민 4명이 무대에 올랐다.》

미디어 관련 스타트업에서 3년째 일하는 오도경 씨(왼쪽)와 애경그룹에서 최초로 여성 임원에 올랐던 유세미 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1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며 “아직도…”란 말을 자주 썼다. ‘민간기업 여성이사 의무할당’에 대해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유리천장이 아직도 실재하는 현실에 대한 공감도 적지 않았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27년. ‘91사번’ 유세미 씨(51)가 처음 입사한 뒤로 ‘18사번’ 오도경 씨(26)가 첫 직장에 발을 디딜 때까지 흘러간 시간. 그동안 대통령이 6번 바뀌었고,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까지 겪으며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갔다.

동아일보 성향조사에서 보수에서 32번째로 나온 세미와 진보에서 34번째란 결과를 받은 도경. 이들은 ‘여성이사 의무할당제’를 두고도 입장이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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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여성이지만 너무도 다른 이들의 대화. 하지만 묘한 한마디가 자주 튀어나왔다. “아직도…”란 탄식이었다. 주로 사회 선배인 세미 입에서 나왔고, 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에서 마주 앉은 이들은 여성 직장인이 겪는 ‘유리천장’ 이슈 앞에서 스물일곱 해라는 간극마저 뛰어넘었다.

○ 69년생 유세미

‘애경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 세미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수식어다. 2016년 은퇴할 때까지 그의 직장생활 26년은 유리천장 부수기의 연속이었다. 신입사원에서 과장, 차장, 부장, 임원까지 언제나 험난하고 생경한 길을 걸었다.

출산휴가를 썼단 이유로 과장 진급 심사에서 누락됐던 1998년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세미는 그 뒤 육아휴직을 아예 포기했다. ‘여자 상사가 있는 부서는 싫다’고 뒷말하는 후배들에겐 악착같이 일해 ‘영업 1등’ 고과 점수로 응수했다.

그런데도 진급 심사 때마다 “여자가 리더여도 되냐”란 물음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세미는 이제는 능력 있는 여자 후배들이 이런 불필요한 질문을 받지 않길 바란다. 여성임원 의무할당제가 여성 인재를 체계적으로 육성할 길을 열어줄 거라 믿는다.

○ 94년생 오도경

이제 사회생활 3년 차인 도경은 여성이 리더가 될 수 없단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자신이 다니는 스타트업은 간부의 성비도 남녀가 비슷하다. 조직문화도 성차별적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경도 세상이 다 바뀌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학생 때 인턴십을 경험한 한 기업의 조직문화는 충격적이었다. 버젓이 성희롱 발언을 해도 어떤 제재도 받지 않는 상사. 인사팀에 피해 사실을 알려도 돌아온 건 오히려 따가운 시선이었다. 도경은 결국 대학 시절 입사를 꿈꿨던 기업에 지원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을 여성임원 의무할당 같은 제도가 해결해줄 거 같진 않다. 조직문화와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오히려 ‘여성이사 1명 이상’이란 규정이 또 다른 꼬리표로 돌아올 수 있다. 스스로 올라갈 수 있는 여성을, 자칫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보게 될까 걱정이다.

○ ‘아직도 그런’ 조직이 있는 사회

▽도경=
저는 여성 1명을 이사회 임원으로 세운다고 깨질 유리천장이 아니라고 봐요. 진짜 그 벽을 없애려면 조직 구성원 다수가 유리천장의 존재를 공감하고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성이사 의무할당제 시행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아요. 단순히 결과적으로 여성 임원 수를 할당하는 제도로는 조직문화를 바꿀 순 없습니다.

▽세미=1명 이상을 의무적으로 뽑게 하는 제도는 분명히 ‘나비효과’를 일으킬 거예요. 이사회에 들어갈 능력 있는 인재들을 여럿 키워야만 가능하거든요. 위로 올라갈 여성 간부 풀(pool)이 형성된단 얘기예요. 그럼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을 때부터 여성 수를 늘리고 육성시스템도 갖추려 노력할 수밖에 없어요.

▽도경=물론 여성 인재 육성이란 긍정적 기대를 걸어볼 순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와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이런 제도가 직장 내 성차별을 해결해주진 않으니까요. 요즘 여성의 경력단절에 대한 고민이 큰데, 육아휴직을 남녀가 동등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등 조직문화의 개선 없이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세미=당연히 이 제도 하나로 유리천장 자체를 깨긴 어렵겠죠. 하지만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딘 것뿐이에요. ‘최소 1명’이란 숫자도 계속해서 늘려 나가야 합니다.

▽도경=여성이사 비중을 늘리면 당장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반격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남성 직장인 입장에선 무언가를 빼앗기는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해요. 이런 사람들이 늘면, 결국 피해는 다시 여성에게 돌아오는 것 아닐까요. 능력만으로도 성별 상관없이 충분히 승진할 수 있는 여성이, 이 제도로 이사회에 들어가면 특혜를 받은 거란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게 아니란 걸 증명하려고 또 여성이사는 남성보다 2, 3배씩 더 노력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도 있고요.

▽세미=그건 실력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임원이 될 때도 인사권을 가진 분의 고민은 ‘유세미를 시켜도 되나’가 아니라 ‘여성을 시켜도 되나’였죠. 그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10명 이상의 몫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유난스러운 여성만 임원이 되는 게 아니라, 여성도 남들만큼의 능력을 증명하면 임원이 될 수 있는 사회로 바뀌길 바랍니다.

▽도경=그 대목은 저도 공감해요. 아직 한국 사회의 인식이 이 제도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반대하는 거지만 여전히 수많은 직장에 성차별 문화가 남아있는 건 현실이잖아요. 불과 몇 년 전 한 대기업에서 인턴사원으로 있을 때였어요. ‘대리 진급까지 여자는 3년, 남자는 1년’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군요.

▽세미=‘아직도’ 그런 기업이 있단 말이에요?

▽도경=네, ‘아직도’ 있어요. 심지어 어떤 상사는 제 손을 잡으며 “쉬러 가자”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어요. 인사팀에 성희롱을 알렸지만 대충 덮으며 조용히 넘어가더라고요. 이렇게까지 수치심을 느끼며 일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죠. 이후엔 그 기업엔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세미=제가 직장을 다닐 때도 회사를 떠나는 똑똑한 여직원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성차별이 만연한 조직문화를 버티지 못하거나 버티기 싫었던 거죠. 이런 인재를 잃는 건 기업도 국가도 손해가 아닐까요.

세미와 도경의 극과 극 무대가 막을 내렸다. 공감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들. 서로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싶을까.

“제가 걸어갈 길을 세미님이 이미 걸어가셨네요. 여성이사 의무할당제가 나왔을 때 전 남녀가 극단적으로 싸울 수 있는 복잡한 문제라 말을 꺼내길 주저했어요. 하지만 제가 가는 길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길을 열어줄 수 있단 생각은 처음 해봅니다. 더 관심을 갖고 깊게 고민해 보려고요.”(도경)

“유리천장이 있다고 미리 겁먹진 말았으면 좋겠어요. 허들을 하나씩 넘다 보면 어느새 길이 열릴 날이 있지 않을까요. 도경님이 30, 40대가 됐을 땐 이런 제도 자체가 필요 없는 사회가 오길 바랄게요. ‘세상에, 옛날엔 이런 제도가 있었대’라고 웃으며 얘기할 날요.”(세미)

○ 특별취재팀


▽지민구 이소연 한성희 신지환(이상 사회부) 조건희 기자

▽방선영 성신여대 사회교육과 4학년, 허원미 숙명여대 시각영상디자인학과 졸업, 디지털뉴스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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