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 자정이면 나타난다, 그 차량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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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잡기 힘든 시간 역주변 무대로… 승용차-렌터카 등 불법영업 활개
외국인 등 폭염 지친 승객들 이용
바가지요금에 범죄노출 우려도… 경찰은 “인력 부족” 단속 뒷짐



서울의 최고 기온이 35도를 넘긴 27일. 밤 12시 무렵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 택시 승강장에는 KTX에서 내린 승객들이 몰려들었다. 택시를 기다리는 60여 명의 승객이 50m 넘게 줄을 서서 부채질을 하거나 휴대용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폭염 불금’에 택시 잡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택시는 5분에 1대꼴. 승객들은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해 택시를 불러봤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30분 넘게 택시를 잡지 못하자 도로변까지 나가는 승객도 보였다. 하지만 택시 운전사들은 목적지를 묻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이때 줄을 서 있는 시민들에게 한 남성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는 “저기 택시가 있다. 더운데 왜 여기서 기다리느냐”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 캐리어를 든 한 여성이 땀을 닦으며 남성을 따라갔다. 승강장 근처에 주차된 검은색 승용차에 탑승했다. 이른바 ‘나라시’였다.

○ 폭염 속 택시 안 잡히자 ‘나라시’ 등장

27일 밤 12시경 서울역 택시 승강장 인근 도로에서 한 승객이 이른바 ‘나라시’라고 불리는 불법 영업 차량에 타고 있다. 
나라시는 ‘택시 등이 손님을 찾아 돌아다닌다’란 뜻인 일본말 ‘나가시’에서 유래한 은어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27일 밤 12시경 서울역 택시 승강장 인근 도로에서 한 승객이 이른바 ‘나라시’라고 불리는 불법 영업 차량에 타고 있다. 나라시는 ‘택시 등이 손님을 찾아 돌아다닌다’란 뜻인 일본말 ‘나가시’에서 유래한 은어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나라시는 ‘택시 등이 손님을 찾아 돌아다닌다’는 뜻인 일본말 ‘나가시’에서 유래한 말로 한국에서는 불법 택시를 가리키는 은어다. 나라시는 주로 금요일과 주말에 활동한다. 늦은 시간 승객이 몰리는 서울역, 강남역, 을지로입구 등이 대표적인 활동 장소다. 최근 계속되는 무더위를 견디지 못한 승객들이 이런 차량을 이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28일 오전 1시경 이모 씨(21)가 경기 평택시로 가는 택시를 잡지 못해 나라시 운전자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씨는 “12만 원에서 8만 원으로 가격을 깎았지만 부담된다. 더워 죽겠는데 집에 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도 나라시 택시의 주 고객이다. 국내에서 불법인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Uber)로 착각해 먼저 운전자에게 접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외국인이 “강남, 하우 머치”라고 물어보자 운전자 한 명이 2만 원을 뜻하는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외국인이 “오케이”를 외치며 흰색 카니발 차량에 탑승했다.

승강장 주변에 모인 10여 대의 나라시는 일반 승용차, 렌터카 등 다양했다. 인천공항이라 적힌 용달 화물차량도 눈에 띄었다. 대전에서 올라온 운전자도 있었다. 그는 “대전에서 올라오느라 힘들었다. 오늘 20만 원은 찍고 가야 한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함께 일하는 택시 운전사가 택시 예약 앱을 활용해 장거리 손님의 위치를 파악한 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체 대화방에서 승객들의 위치 정보를 공유했다. 그러면 이른바 ‘터줏대감’이 운전자 간 목적지와 방향을 겹치지 않게 나누고 조율했다. 방향이 맞으면 합승을 시도한다. 합승도 불법이지만 ‘이익 극대화’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 경찰서 맞은편에서 버젓이 불법 영업

오전 2시 나라시 택시 탑승을 직접 시도해봤다. 터줏대감 A 씨가 가격 흥정을 맡았다. 기자가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방향 1만5000원을 제시하자 “그쪽은 같이 갈 사람이 없어 2만 원을 주지 않으면 안 간다”고 했다. 2만 원에 협상을 마친 뒤 A 씨가 알려준 차량에 탑승했다. 운전자는 현금을 요구했다. 휴대전화 앱을 통해 계좌이체를 시켰다. 일부 차량은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 차량을 세운 뒤 승객이 인출한 돈을 받았다. 불법 운행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나라시는 운전자들의 범죄 경력 조회가 되지 않아 승객이 범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합승과 바가지요금 등 각종 불법 행위도 벌어진다. 서울역 택시 승강장 큰길 바로 맞은편에는 경찰서가 있었지만 단속은 없었다. 서울역파출소 관계자는 “승객들의 신고가 거의 없고 단속할 인원은 한정돼 있어 매번 단속하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말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김민찬 인턴기자 서울대 미학과 졸업
#나라시#불법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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