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간첩사건’ 위증혐의 수사관, 재판 중 구속 ‘이례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일 22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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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간첩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재일교포 2세 윤정헌 씨(64)의 재심에서 가혹행위가 없었다고 위증한 혐의로 기소된 전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 전직 수사관이 재판을 받던 중 법정 구속됐다. 불구속 피고인이 속행 공판에서 법정 구속되는 건 이례적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이성은 판사는 2일 위증 혐의로 기소된 전직 보안사 수사관 고병천 씨(78) 공판에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인다”며 구속영장 집행을 명령했다. 이 판사가 고 씨를 구속한 건 피고인 신문 과정에서 고 씨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선처를 호소하면서도 고문 당시 상황에 대해선 구체적인 진술을 거부한 탓이다.

고 씨는 “이 사건과 관련해 어떤 형태로든지 가혹행위에 관여한 것은 사실이고,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동료와 선후배들 때문이었다”며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바란다. 윤 씨와 다른 모든 분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문 피해자들 대리인인 장경욱 변호사가 피해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고문 사실을 기억하느냐고 묻자 고 씨는 일부 피해자들에 대해 “기억이 없다” “잘 모르겠다”고 답변을 피했다.

이 판사는 “(이 사건은) 위증 사건이지만 본질은 위증에 한정할 수 없는 사건이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죄가 이뤄지려면 피고인에게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매우 힘든 과정이기 때문에 피고인은 재판 끝까지 자신을 지켜야 된다”며 “도주의 염려,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아 구속영장을 집행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고 씨는 재판이 끝난 뒤 법정에서 구속됐다.

이날 법정에는 윤 씨를 비롯해 다른 고문 피해자들도 방청했다. 방청석에 있던 윤 씨는 “오늘 사과한다고 해서 기대하고 왔는데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며 “가볍게 형을 받고 이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은 게 속마음 아니냐”고 항의했다.

윤 씨는 1984년 10월 보안사 수사관에게 끌려가 43일간 불법구금 상태로 고문을 당하고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뒤 법원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아 약 3년 간 복역했다. 이후 윤 씨는 재심을 청구했고 2011년 12월 대법원은 무죄를 확정했다.

고 씨는 2010년 윤 씨의 재심에 증인으로 출석해 “구타나 협박 등 가혹 행위를 했느냐”는 등의 질문에 대해 모두 부인해 위증한 혐의로 기소됐다.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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