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할리우드 스타들 앞장… 한국 유명인사들 나서기 꺼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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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같은 듯 다른 한국과 미국의 미투

《미국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과 한국의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화려한 경력에서 공통점을 찾기 힘든 두 사람이지만 연결고리가 하나 있다. 한미 양국을 각각 뒤흔들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의 진원(震源)이라는 점이다. 와인스틴은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촉발된 미투 캠페인의 핵심 타깃이었다. 안 전 검찰국장은 그로부터 100일을 조금 넘긴 올해 1월 말 시작돼 문화예술계 등을 강타하고 있는 한국판 미투의 도화선이었다.

양국의 미투 운동은 권력이나 특정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남성 ‘갑’을 상대로 ‘을’의 위치에 있는 여성이 피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법에 호소하는 등의 기본 구조는 비슷하다. 다만 미투 운동이 본격화되는 양상과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 등에서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여기에 미국은 해당 분야에서 정상급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인사들이 주도하는 반면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인지도 높은 인사들이 나서기를 꺼린다. 법률적인 환경과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미투의 진원, 미국은 할리우드 vs 한국은 검찰

미국의 미투 운동은 2006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양상으로 확대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10월 와인스틴이 여배우와 여직원들을 상대로 갖가지 성추행 및 성희롱을 한 사실을 보도하면서부터다. 이후 앤젤리나 졸리, 귀네스 팰트로, 애슐리 저드 등 세계적인 스타 여배우들이 성추행을 당한 과거를 털어놓으며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로 미투 운동이 확산됐다.

한국의 미투 운동은 2016년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관련 분야의 관심을 촉구하는 수준에 머물면서 ‘찻잔 속 태풍’에 그쳤다. 현재와 같은 폭발력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서지현 검사의 폭로’다. 술 취한 검찰 고위 간부로부터 상갓집에서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을 당했고,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려 하자 보복성 인사 조치를 당했다는 서 검사의 폭로 이후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 전반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검찰은 사법정의를 실천하는 게 목적인 국가기관인 만큼 윤리 수준에서도 국민들의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며 “(문화예술계처럼 대중적인 관심이 늘 집중되는 분야는 아니지만) 검찰 내 고위 인사가 성추행을 저질렀고, 피해자가 이를 방송에서 자세히 밝힌 건 사회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권력 남용과 불공정 수사 의혹 등으로 검찰이란 조직 자체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쌓여 있었던 점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 미국은 정상급 스타가 주도하지만 한국은 아직…


미투 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의 면면도 차이가 있다. 미국에선 와인스틴이 배우와 회사 직원 등 주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추행과 성희롱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졸리, 팰트로, 저드 등 글로벌 스타들이 앞장섰다. 이들은 과거 자신이 당했던 피해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나아가 조직적인 미투 운동 지지 움직임을 펼쳤다.

한국에선 아직까지는 정상급 스타나 유명 인사들이 나서기를 꺼리고 있다. 고은 씨의 성추문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 정도가 그나마 대중적으로 익숙한 이름이다. 문화예술계 안팎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높지 않았던 과거에 성희롱과 성추행이 더 심하고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공공연한 비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유명 여성 문화예술인들이 미투 운동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선 한국이 아직까지 성폭력과 여성 지위 향상 같은 이슈를 자유롭게 논의하기 어려운 분위기임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유명 인사들의 경우 자칫 자신이 갖고 있는 특권이나 지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길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에선 연예인들이 어떤 정치적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지지하는 연대가 존재하고 이어 사회적인 목소리가 만들어지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는 지적이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양성평등과 차별 방지에 대한 교육이나 논의의 역사가 길다”며 “한국에 비해 여성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도 적다”고 말했다. 이어 “정상급의 여자 배우들이 할리우드 권력자(와인스틴)를 대상으로 정면 대결을 펼칠 수 있다는 것도 사회적으로 이런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 한국 미투 운동의 걸림돌, ‘명예훼손법’

한미 양국의 미투 운동이 다르게 진행되는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들의 대응 태도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소송 등에 적극 나서는 반면 한국은 당사자 사과를 요구하는 수준에 머무는 등 소극적인 대응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차이는 국내에만 있는 법률적인 제약이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허위사실이 아닌 진실을 폭로해도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한 형법 제307조(‘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법은 공개적으로 사실을 밝혀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비방할 목적이 더해진 경우 정보통신망법 제70조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다. 결국 피해자들이 성폭력 사실을 알리고 싶어도 이런 법들에 저촉돼 역고소를 당할까 봐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피해자 발언의 사실 여부와 명예훼손의 조각 사유인 공익은 그 성격과 기준이 불분명한데 공개적인 폭로는 명예훼손 구성 요건에 분명히 해당해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은 1964년 명예훼손 처벌법을 위헌 처분한 ‘개리슨 대 루이지애나’ 사건 이후 대부분 주에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을 폐지했다. 매사추세츠주, 미네소타주, 몬태나주, 뉴햄프셔주 등 4개 주만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그만큼 피해자들이 자유롭게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 미투 운동, 일반으로 확대 중

미국의 미투 운동은 유명 여성인사들 중심에서 일반인들로 확대되는 추세다. ‘타임스 업(Time‘s Up·한 시대가 끝났다)’ 단체 결성이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 1월 1일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각계 여성 300여 명이 모여 결성한 타임스 업은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블루칼라와 저소득층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방지와 지원 활동도 활발하다.

타임스 업에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법조계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다. 특히 법조계에선 자원봉사 형태로 무료 법률 상담을 해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이라 법적 대응에 나서기 어려운 피해자들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다. 필요할 경우 소송비 지원 같은 활동도 가능하다. 현재까지 마련된 기금 규모도 2000만 달러(약 216억 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 교수는 “미국의 경우 여성 성폭력에 대응하는 문화가 강한 데다 최근 유명인들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이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관련 움직임이 확장되기 용이한 여건”이라며 “당분간 미투 움직임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한국에서도 앞으로 미투 운동은 법조계, 문화계를 넘어 일반 직장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의 익명 게시판에는 이미 직장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글이 수백 건 올라와 있다. “직장 상사가 좋은 노래라며 보내온 뮤직비디오를 틀어보니 낯 뜨거운 영상이 튀어나왔다”거나 “회식할 때 내 허벅지를 주무르더니 다음 날 딸 같아서 그랬다고 말하더라”는 식이다. 하지만 미국처럼 조직화되지 못하고 개인의 고발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한편 최근 확산 일로에 있는 미투 운동의 실상을 접하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적잖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성폭력이 만연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가해자의 잘못된 과시욕과 피해자의 피해의식, 방관자의 무관심 등이 깔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석정호 연세대 의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많은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심리를 왜곡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들이 변화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하면서 성희롱을 쉬쉬하던 일반 기업에서도 ‘작은 미투 운동’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관대했던 佛, 길거리서 집적대면 과징금 12만 원▼

성폭력 고발 목표 같지만 나라마다 상황 제각각

현재 미투 운동은 전 세계적인 사회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양상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프랑스는 그동안 남성들의 유혹에 관대해 상대적으로 성에 대해 자유롭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이후 프랑스 전역에서 미투 운동을 지지하며 남성들의 성희롱을 규탄하는 여성들의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성의 40% 이상이 동의하지 않은 신체적 접촉이나 성희롱 발언을 경험했고, 심지어 10%는 성폭행을 당한 경험도 있다는 충격적인 조사가 계속해서 공개됐다. 이에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성희롱과 추행을 바로잡겠다며 낯선 여성에게 외설적인 발언을 하거나 길을 막거나 쫓아가는 이른바 ‘캣콜링(cat-calling)’ 행위에 90유로(약 12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영국은 정치권에서 미투 운동이 태풍급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장관이나 의원의 여성 비서진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이어지면서 테리사 메이 내각이 휘청거릴 정도다. 메이 총리의 정치적 동지로 국무조정실장 겸 수석비서 역할을 한 데이미언 그린 영국 부총리가 컴퓨터에 음란물이 들어 있고 여성 활동가의 무릎을 만졌다는 의혹에 결국 물러났다. 마이클 팰런 국방장관은 2002년 여기자를 성희롱한 사건으로 사임했고, 마크 가니에이 국제통상부 각외장관(수석차관)은 여비서에게 성인용품 가게에서 전동 자위기구 두 개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영국 의회는 비서진이 성희롱 사실을 편하게 고발할 수 있는 기구를 마련하고, 성희롱이나 괴롭힘을 가한 사실이 드러나는 의원은 의원직을 박탈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영국 의회 행동지침을 마련 중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미투 운동이 진행 중이지만 파장은 다른 선진 외국에 비해서 ‘찻잔 속 태풍’ 수준이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 씨가 지난해 5월 실명으로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일본판 미투 운동은 시작됐다. 이토 씨는 2015년 4월 취업 상담을 위해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 당시 TBS 워싱턴 지국장을 만났다가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처녀냐’고 묻는 등 상식 이하의 태도를 보이거나 야마구치 지국장을 불기소 처분하는 등 기대를 밑도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이에 이토 씨는 ‘블랙박스’라는 책을 내고 주일 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전면전에 나섰다. 현재 야마구치 전 지국장을 상대로 1000만 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후 작가이자 블로거인 하추 씨가 광고 대기업 덴쓰에서 일할 당시 밤에 선배 사원의 집에 불려갔다는 등의 피해를 고백했고, 연출가인 이치하라 미키야(市原幹也) 씨가 과거 자신의 성추행 사실을 고백하고 사죄했다.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처럼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양상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2015년 후생노동성 조사에서 일하는 여성의 3분의 1이 성추행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을 정도로 선진국치고는 아직 성추행에 대한 의식이 낮은 편이다. 화합을 강조하며 내부 폭로를 막는 사회적 분위기도 미투 운동의 확산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세형 turtle@donga.com·이설·김상훈 기자·파리=동정민 ditto@donga.com/도쿄=장원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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