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10분전까지 SNS채팅 큰딸, 화마 못 뚫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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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여관 화재’ 희생 세모녀 사연
숙박비 아끼려 2만5000원에 투숙… 여관주인 “아이들 신나보였다”
큰딸은 가수-둘째는 마술사 꿈꿔, 집앞엔 추모객이 놓은 흰 국화만…

22일 전남 장흥군의 한 아파트 현관 앞. 새하얀 국화 바구니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리본에는 ‘하늘에서 행복하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곳은 20일 서울 종로구 서울장여관 방화로 숨진 A 씨(35·여)와 두 딸의 보금자리다. 큰딸(15)이 다니던 중학교 관계자들이 집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는 집 앞에 국화를 놓고 발길을 돌렸다.

큰딸은 웃음이 많고 성격이 쾌활해 친구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지난해 1학기 때는 일하다 다친 아빠를 간호하기 위해 조퇴하고 병실을 지키던 효녀였다. 또 학교 축제 때면 빠지지 않고 무대에 오를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그래서 꿈이 가수였다. 그냥 가수가 아니다. 큰딸의 생활기록부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가수’라고 적혀 있다. 학교 관계자는 “아직도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장흥군의 한 초등학교 교실 책상에도 국화 한 다발이 놓였다. A 씨의 작은딸(12)이 공부하던 책상이다. 둘째 딸의 꿈은 마술사였다. 둘째 딸은 마술을 하는 것이 멋있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A 씨와 남편(40)은 5년 전 귀향했다. 남편은 기술직 근로자로, 아내는 과일가게나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부부는 자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다. 한 주민은 “A 씨 부부뿐 아니라 두 딸도 착했다. 너무 예쁜 가정이었는데 방화범이 한순간에 파괴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라고 말했다.

세 모녀는 15일 여행을 떠나 21일 집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남편은 일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여행 전날 큰딸은 “내일부터 엄마랑 동생이랑 여행간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충남 천안과 대전을 거쳐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A 씨는 숙박비를 아끼려 종로 일대의 허름한 여관을 찾다가 서울장여관의 문을 두드렸다. 세 모녀의 숙박비는 2만5000원이었다. 여관 주인 김모 씨(71·여)는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고 말했다. 이날 큰딸은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오전 2시가 넘도록 친구들과 단톡방(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여행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전 2시 50분경 친구가 보낸 메시지 옆 작은 숫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카카오톡 메시지는 수신 확인 전 숫자 ‘1’이 표시되고 상대방이 읽으면 숫자가 사라진다. 큰딸은 이때쯤 잠이 든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10여 분 뒤 화마가 세 모녀를 덮쳤다.

세 모녀의 빈소는 보금자리가 있는 장흥에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장흥군은 세 모녀를 위한 성금 200만 원을 마련하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한 모금도 추진하기로 했다.

장흥=이형주 peneye09@donga.com / 배준우 기자
#화재#화마#쪽방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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