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눈 벗어나니 늙어서도 새 세상”

  • 동아일보

영등포구청 ‘늘푸름학교’ 개교 2년
글 읽고 쓸 줄 모르는 노인 위한 교실… 아픈 몸 이끌고도 출석률 95% 열정
배운 글로 시집 내고 자서전 쓰고… “100세 인생 최고의 노후준비 됐죠”

1일 서울 영등포구청 ‘늘푸름학교’에서 배움의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한글 수업을 받고 있다. 영등포구는 지난해 한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늘푸름학교를 개설했고 이 학교에서 약 8개월간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은 초등 학력을 인정받는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1일 서울 영등포구청 ‘늘푸름학교’에서 배움의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한글 수업을 받고 있다. 영등포구는 지난해 한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늘푸름학교를 개설했고 이 학교에서 약 8개월간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은 초등 학력을 인정받는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내 인생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6개월 치 육성회비가 밀려 국민학교 4학년 때 학교에서 쫓겨난 뒤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가난은 계속됐다. 글을 모른 채 60여 년을 살았다. 그런 내가 ‘자서전’을 냈다.”

지난해 한글을 깨친 임태기 씨(70)가 직접 쓴 자서전 서문의 한 대목이다. 8일 출간되는 자서전 제목은 ‘내 인생은 여기까지다’. 한글을 배우기 전 공사판을 전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68세까지의 자기 인생을 표현했다. 임 씨는 불과 2년 전까지 간판 하나 제대로 읽지 못했다. 식당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미용실인 경우도 있었다. 신문을 읽지 못해 세상일에 어두워 정치 문제를 놓고 동네 친구들과 다투기도 했다. 네 살배기 손녀에게 그림책을 읽어주지도 못하다 보니 가족과 만나기를 피하기까지 했다.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임 씨가 지난해 찾은 곳은 영등포구청이었다.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노인을 위한 ‘늘푸름학교’ 개교 소문을 들었다. 친구들이 구청에는 왜 다니느냐고 물으면 “영어 배우러 다닌다”고 거짓말했다. 그런 임 씨가 자서전을 낸 것이다.

임 씨가 1회 졸업생인 늘푸름학교에는 3개 반이 있다. 신청자 교육 수준에 따라 초등학교 1∼2학년, 3∼4학년, 5∼6학년 반 중에 한 반에 들어간다. 어느 반이든 약 8개월간 수업을 받으면 초등학력을 인정받고 졸업한다. 지난해 10월 첫 졸업생 35명이 나왔다. 구청 관계자는 1일 “출석률은 95%였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도 수업은 빼먹지 않았다. 배우겠다는 열정이 그만큼 대단하다”고 말했다.

올 3월 신입생은 68명이었다. 지난해의 2배가량이다. 입학 신청은 선착순으로 1월 2일부터 받았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마감했다. 이 중 30%는 다른 구에 산다. 먼 길임에도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온다. 김임수 씨(78·여)도 그런 학생이다. 관절염으로 온몸이 쑤시는 날에도 주 3일 수업에 결석하지 않았다. 김 씨는 “글을 몰라 동사무소나 은행에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 대신 해주던 남편이 2년 전 세상을 뜨고 나서 막막했다. 죽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최고령 학생이다”라고 말했다.

글을 배우는 게 전부는 아니다. 글을 배운 이들은 활동 저변을 넓혀 간다. 시를 써서 시집을 내고, 기존 노래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합창대회에도 나간다. 최기자 씨(69·여)는 “죽을 날만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배운 뒤로는 ‘내일은 뭐 하지’를 고민한다. 살맛이 난다”며 웃어 보였다. 김태수 씨(69)도 “손자를 데리고 패스트푸드점에 가도 메뉴를 읽을 줄 몰라 햄버거 하나 주문하지 못했다. 지금은 주말마다 같이 브런치카페를 찾아다니는 게 취미가 됐다”고 말했다.

구청에서는 첫 졸업생들이 쓴 시를 묶어 ‘보고시픈 당신에게’란 시집을 냈다. 가난해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이들의 삶이 녹아 있다. 최희복 씨(71·여)는 “100세 인생이 돈 있고, 배운 노인들에게만 허락된 게 아니다. 지금 배운 글로 온전히 내 인생을 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노후’를 준비해 갔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까막눈#늘푸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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