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20대 초반에 잃은 ‘세상의 빛’… “열심히 살다보니 길이 열리네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79> 시각장애인 CEO 김갑주 씨

김갑주 씨가 16일 광주 남구 사동 광주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실에서 최근 발간한 ‘어둠 속의 빛을 찾아’라는 자전 에세이를 설명하고 있다. 자서전 판매 수익은 시각장애인 종합복지타운인 어둠 속의 빛 건립에 쓰인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김갑주 씨가 16일 광주 남구 사동 광주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실에서 최근 발간한 ‘어둠 속의 빛을 찾아’라는 자전 에세이를 설명하고 있다. 자서전 판매 수익은 시각장애인 종합복지타운인 어둠 속의 빛 건립에 쓰인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2010년 10월 21일 오전. 김갑주 씨(55)는 광주 자택에서 신문과 뉴스를 접한 뒤 식사를 했다. 이어 콜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도착하자 그는 아내(57)의 손을 잡고 나와 택시를 탄 뒤 ‘광주 북구 두메외식산업으로 가달라’고 했다.

택시 운전사는 “30년 동안 운전하면서 부인이 남편 손을 잡고 택시 문을 열어주는 것은 처음 봤다. 행복하겠다”고 김 씨에게 말했다. 그러자 김 씨는 미소를 지으며 “저는 1급 시각장애인”이라고 답했다. 운전사는 “장애 중에 가장 애잔한 것이 시각장애다. 아침부터 두메에 누구를 만나러 가냐”며 안타까워했다. 김 씨는 “내가 두메 대표여서 일하러 간다”고 말했다. 운전사는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사업을 하냐. 대단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행복한 사람에서 불쌍한 장애인을 거쳐 대단한 사람까지, 3차례 다른 평가를 받은 김 씨의 일화다. 그는 “사람들이 ‘돈이 없다’, ‘나이를 먹었다’ 등 현실이 어렵다는 말을 하는데 피할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할 운명”이라며 “문을 열겠다며 열심히 살다 보니 길이 열렸다”고 했다.

○ 20대 초반에 잃은 세상의 빛

전남 보성군 조성면이 고향인 김 씨는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철도공무원으로 일하던 성실한 가장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 광주로 와 광천초교를 졸업했다. 이후 송원중, 전남고를 거쳐 조선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82년 그는 대학 3학년 때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질환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망막색소변성증은 야맹이 먼저 오고 시야가 좁아지며 3∼5년 안에 실명한다’고 했다. 그는 희귀질환 판정 직후 왼쪽 시력을, 27세 때 오른쪽 시력을 잃었다. 이후 30대 중반에는 빛마저 볼 수 없게 됐다.

김 씨는 희귀질환 판정에 희망을 잃었다. 한동안 술과 담배에 빠져 광주역 대합실 의자에서 노숙인처럼 잠을 잤다. 세상이 무너지고 삶이 끝나는 듯했다. 그의 괴로움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지인들은 시각장애인들을 소개시켜 줬다. 당시 상당수 시각장애인들은 월 2800원의 국가지원금을 받았고 구걸을 하거나 안마·침술사로 일했다.

김 씨는 시각장애인들을 보고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번뇌가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대학에 다니고 부모로부터 최소한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일일찻집 등으로 성금을 모아 시각장애인들을 도왔다. 또 천주교 광주대교구 시각장애인선교회를 만들었다.

그는 안마·침술이 아닌 새 직업을 찾고 싶어 교사나 회사 취업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책 방문 판매나 의료보험 조합원 모집 등의 일을 하고 친구와 함께 포장마차를 운영했다가 그만뒀다.

○ 장사는 진실을 파는 것


김 씨는 1986년 광주 동구 금남로 가톨릭센터(현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가톨릭다방을 열었다. 주변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업을 하냐”며 걱정했다. 그는 다방 문을 열면서 ‘성공하겠다’, ‘돈을 벌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겠다’는 두 가지 다짐을 했다. 이 다짐은 31년간 지켜졌다.

김 씨는 직원들보다 먼저 출근해 다방 청소를 하고 신문과 잡지를 비치했다. 또 좋은 음악과 소품을 갖추고 발효 매실차, 자연식 율무차, 야채·과일주스 등 당시로 보면 파격적 메뉴를 구비해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92년 다방 사업이 쇠락하자 인근에 직장인들을 겨냥한 두메야채잔치라는 식당 문을 열었다. 그는 ‘양심적인 재료로 맛있는 건강식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식당은 2층에 위치했지만 정직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는 소문이 퍼져 손님들이 줄을 섰다. 이후 1993년 만든 두메외식산업은 24년 동안 200만 명에게 출장요리와 도시락을 제공했다.

김 씨는 1995년 조선대 공대 구내식당 운영자로 선정돼 단체급식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구내식당 운영은 준비한 사람이 이긴다는 진리가 빛을 봤다. 당시 조선대 측은 구내식당 운영 지원자 10여 명을 상대로 음식·위생 등에 대한 시험을 봤는데 항상 음식 공부를 하던 김 씨가 1등을 차지했다.

그는 이후 물류센터, 김치공장 등을 세우며 사업을 키웠다. 직원이 400명이 넘을 정도로 사업체는 확장됐지만 내부 사정은 악화됐다. 일부 거래처에서 돈을 받지 못하거나 곡물 파동으로 음식 원가가 높아지면서 이익은 떨어졌다.

2010년 11월 두메외식산업은 기업회생 신청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김 씨는 채권자들에게 미안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채권 일부만 갚기로 약속하고 기업회생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는 집을 팔아 기업회생에 보탰고 지인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7억 원을 빌려줬다. 그와 가족들은 예전에 장애인들이 생활했던 쉼터 꿈동산 그룹홈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이 아파트는 그가 다방을 운영할 때 생긴 수익금으로 지어 기부한 것으로 교회 소유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13년 11월 두메외식산업은 기업회생을 졸업했다. 김 씨는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 기업회생 과정에서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현재 두메푸드시스템은 단체급식 30곳과 식품자재 유통 등으로 연 매출액 80억 원을 올리고 있으며 직원 130명이 일하고 있다.

사업(장사)은 아이디어와 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진실을 파는 것이라고 김 씨는 생각한다. 그는 “대기업이 골목상권에 뛰어들거나 고액 연봉자가 나눔을 실천하지 않으려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며 “분배와 나눔 정신 확산이 절실하다”고 했다.

○ “주변을 돌아보는 삶”

김 씨는 지난달 30일 ‘어둠 속의 빛을 찾아’라는 자서전을 발간했다. 그는 자서전 인세 등을 모아 어둠 속의 빛이라는 시각장애인 종합복지타운을 지으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어둠 속의 빛은 일반 시민들이 어두운 공간에서 시각장애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일상생활을 해보는 체험 공간이다. 또 장애인들이 만든 공예품을 판매하거나 재활·취업을 연계하는 사업 공간이다. 김 씨는 “전국 시각장애인이 25만 명인데 평화 인권도시인 광주에 시각장애인 특성화 시설이 건립되면 좋겠다”고 했다.

김 씨는 시각장애인 봉사활동을 하다 자원봉사자였던 아내를 만나 슬하에 대학생 남매를 뒀다. 그는 사업을 시작한 이후 꿈동산 그룹 홈을 시작으로 동신자활후견기관을 만들고 2013년부터는 광주시각장애인연합회장을 맡는 등 나누는 삶을 실천한다. 또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을 약속했다. 그는 각종 기부와 후원 등 사회봉사활동으로 70여 차례 수상을 했다. 올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는 국민훈장 석류장도 받았다.

그는 2007년 실패한 사업가, 실업자 등과 빛고을두메산악회를 결성해 일본 후지산을 비롯해 설악산 대청봉, 월악산, 모후산, 지리산, 한라산 등을 올랐다. 또 2009년에는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와 한화 이글스의 광주경기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그동안 삶은 순탄치 않았지만 꼭 필요한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사회활동은 인생의 디딤돌과 통로였고 행복을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일하고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1급 시각장애인 최고경영자(CEO)이자 장애인 복지 사업가인 김 씨가 앞으로 삶의 방향을 밝히는 한마디였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