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Opinion]쌍용자동차 사태 8년, 해고는 길고 트라우마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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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12월 19일 14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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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의 Human Space(3)

2012년 4월 대한문에 설치된 쌍용차 농성장은 결국 철거됐다. 중구청은 그 자리에 화단을 조성했다.
2012년 4월 대한문에 설치된 쌍용차 농성장은 결국 철거됐다. 중구청은 그 자리에 화단을 조성했다.

12월 10일은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다음 날이자 세계인권선언 제68주년 기념일이다. 이날 점심 무렵 서울 정동 경향신문 별관 2층에 쌍용자동차 해고자가 하나둘 모여들었다. 노동자들은 오랜 기간 연대했던 지인들을 초청해 소박한 송년회를 열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요?”라고 적힌 현수막 카피처럼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였다.

1년 전 쌍용자동차 노사와 해고자들은 어렵게 합의문을 작성했다. “회사는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복직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비정규직 6명을 포함해 18명이 복직됐을 뿐 148명은 아직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사이 경찰이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등을 상대로 제기한 15억여 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은 항소심까지 진행돼 날마다 61만 원씩 이자가 쌓인다.

공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몇 사람에게 근황을 묻자 뭔가 개운치 않은 표정이다. 아마도 바깥에 남아 있는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복직할 때는 생각이 많았는데 막상 들어가고 나니 안에서 뭘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짓눌림’이라고 표현했다.

김득중 쌍용차노조 지부장은 송년회 인사말에서 “마지막 한 사람이 복직할 때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1년 전 합의문이 발표된 직후에도 그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맨 마지막 순번이 될 것임을 선언했다. 이제 회사가 약속한 시간은 6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합의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쌍용차 노조는 다시 험한 길을 가야할지도 모른다.

12월 10일 쌍용차 노동조합의 송년회 모습.
12월 10일 쌍용차 노동조합의 송년회 모습.


옥쇄파업과 죽음의 행렬

2009년 5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은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해 4월 8일 회사 측이 2646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발표하던 날, 비정규직 노동자 오창석 씨가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비극의 시작일 뿐, 총파업과 공권력 투입 국면에서 다섯 명이 더 희생됐고 그 숫자는 이제 ‘28’에 이르렀다. 사인은 병사와 자살, 유서 한 장 없는 허탈한 죽음의 행렬이었다.

2009년 옥쇄파업을 벌이던 노동자들은 자고 일어나면 부고를 들었다. 어떤 이는 생활고를 비관해 번개탄을 피워놓고 죽었고, 또 다른 이는 사측의 회유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 그 와중에도 경찰은 한 번 띄우는데 600만 원이 넘는다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수천 리터의 최루액을 살포하고, 국제앰네스티에서 사용 금지한 테이저건을 쏘았다. 소설가 공지영은 르포집 <의자놀이>에서 그날의 공권력 투입을 두고 ‘인간사냥’이라고 썼다.

77일간의 총파업이 진압된 뒤 96명이 구속됐다. 노사는 막후 협상을 벌였지만 번번이 결렬됐다. 그 사이 노동자와 노동자의 가족은 죽고 또 죽었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선 해고자들은 ‘쌍용차 출신’이란 이유로 불이익을 받았고, 언론의 날선 비판으로 지역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해고자들이 사는 아파트의 관리소장까지 나서서 국정조사 반대 서명운동을 벌일 만큼 여론몰이는 집요했다.

해고자들은 쌍용차 사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철탑과 굴뚝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하늘에서 띄우는 소식이 SNS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시민들은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평택으로 달려와 문화제를 열었다. 해고자들은 자신들을 잊지 않고 찾아와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부산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응원하기 위해 하루 50km씩 직접 걸어가는가 하면, 전국의 농성장을 빠짐없이 돌아다녔다.

대한문 쌍용차 농성장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와 문화제가 열렸다.
대한문 쌍용차 농성장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와 문화제가 열렸다.


2012년 3월. 옥쇄파업을 꿋꿋이 견뎠던 서른여섯 살의 청년 이윤섭 씨가 임대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이 죽음 직후 서울 대한문에 농성장을 차렸다. 평택에서 회사를 상대로만 싸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대한문 앞에 천막을 치려는 노동자들과 천막을 빼앗으려는 경찰 및 공무원의 싸움은 줄기차게 진행됐다. 많은 시민이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대한문으로 몰려들었고 쌍용차 해고자들은 마침내 서울 한복판에서 국가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독재자의 딸은 여기 올 수 없다.”

김정우 전 쌍용차 지부장은 대한문에서 가장 처절하게 싸웠다. 경찰이 농성장을 철거하려 하자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올무에 목을 걸었다. 추운 겨울 41일 동안 단식농성을 벌이며 저항한 일도 있었다. 그는 2013년 6월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돼 징역 10월을 살았는데, 교도소에서는 대한문에서의 자해 경력을 이유로 독방을 배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의 구속은 1년 전에 예고됐다. 2012년 8월 28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는 청계천에 설치된 전태일 흉상을 기습 방문했다. 이날 김 전 지부장은 박근혜 후보 앞을 가로막고 드러누워 “독재자의 딸은 올 수 없다”고 맞섰다. 경호원들이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려 했지만, 그는 끝까지 저항했다. 미운 털이 박혔음은 능히 짐작할 만하다.

김 전 지부장은 요즘 지하철 상도역 1번 출구 부근 실내포장마차에서 일한다. 사장님은 아내 조해숙 씨다. 해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궁여지책으로 최저생계비라도 벌어야겠다”고 시작한 일이 이제 생업이 됐다. 가사노동이라고는 생전 거들지 않던 사람이 이제 주문도 받고 음식도 나른다. 여름철엔 아내가 개발한 오징어물회 덕분에 단골이 늘었으나 요즘은 하루 매출이 20만 원을 넘지 못할 만큼 불경기란다.

해고된 김정우 전 지부장은 포장마차에서 일한다.
해고된 김정우 전 지부장은 포장마차에서 일한다.


김 전 지부장은 포장마차에서도 노동자들과 함께 할 일을 생각한다. 실제로 2012년엔 일요일마다 식당을 노동조합에 빌려주고 이곳에서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 ‘희망밥집’을 운영했다. 그는 노동자와 함께 나누는 일이라면 언제라도 식당을 내주겠다고 말한다. 장사가 아무리 급해도 요즘처럼 엄중한 시절엔 거리로 나가 동지들도 만난다. 12월엔 아내와 함께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두 번이나 식당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밤부터 새벽까지 장사를 하다 보니 건강이 악화된 점이다. 밤낮이 바뀐 생활 탓에 단식농성을 할 때처럼 체중이 15kg이나 빠졌다. 조해숙 씨는 “남편이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다. 요즘은 손님이 주문하는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해고기간이 8년쯤 되니까 멍해진 것 같다. 그게 다 가슴에 쌓인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전 지부장은 1960년생이다. 이제 복직하더라도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야 3년이다. 1990년 입사해 20년간 기름때를 묻힌 노동자의 소망은 변함없이 ‘노동조합 정상화’다. 그는 여전히 “바늘구멍이라도 희망이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을 되새긴다. 실내포장마차 벽면엔 이윤엽 작가의 ‘철탑농성’ 판화가 걸려 있고, 바로 아래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쌍용#자동차#쌍용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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