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시선/박덕진]순국 94주기 김가진은 고국이 그립다

  • 동아일보

박덕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연구실장
박덕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연구실장
1922년 7월 4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역이자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였던 동농 김가진이 눈을 감았다. 임시정부로 망명했던 유일한 대한제국 관료. 상하이 망명 이후 “지난 1년여 동안 우리 민족이 취해온 평화적 수단은 도리어 문약무혈(文弱無血)이라는 환각을 주었을 뿐”이라고 비판하며 전면적인 독립전쟁을 주창하던 그였다. 불꽃같은 삶 하나가 막을 내리는 순간을 아들 김의한과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조소앙 등이 지켜보았다. 1922년 7월 7일자 동아일보는 김가진을 ‘유력한 독립운동단체 대동단의 총재’로 소개하며 그의 순국 소식을 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은 7월 8일 오후 상하이에서 열렸다. 한때 2000명에 이르렀던 교민이 500명 아래로 떨어진 시점이었지만 조문한 사람이 270명, 장지에 모인 사람이 백수십 명에 달했다. 교민사회 전체가 장례를 치른 것이다. 하관에 앞서 열린 추도식에서 당시 임시정부 주석 홍진이 개식사를 하고 조완구가 김가진의 역사를 설명했다. 이발과 안창호 두 사람이 추도사를 했다. 사실상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장(葬)’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순국 94주기가 되는 김가진은 아직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아직 차디찬 이국땅에 묻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김가진에 대한 서훈을 ‘보류’하고 있다. 남작 작위를 받는 등 생전에 일제에 협력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김가진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한 것은 일제 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였으며,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임시정부 고문역과 북로군정서 명예고문, 비밀결사 대동단 총재로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그래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장’의 예우로 장례를 치른 것이다.

“관 뚜껑을 닫을 때 비로소 한 사람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진다”란 말이 있다. 국가보훈처의 처사는 김가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순국하고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유해는 아직 상하이에 있다. 이제 그의 국내 봉환을 추진해야 한다.

박덕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연구실장
#대한민국임시정부#독립운동가#김가진#순국 94주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