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씁쓸한 퇴장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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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감독, 30일 베토벤 ‘합창’으로 서울시향 마지막 지휘

마지막 연주를 끝낸 마에스트로에게 관객은 기립박수를, 연주단원들은 눈물을 바쳤다.

사퇴 의사를 밝힌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30일 마지막으로 지휘한 곡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었다.

정 감독은 이날 오후 9시 10분경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합창’의 피날레와 함께 서울시향의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공연장을 찾은 관객 2300여 명은 거장의 지휘를 서울시향에선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에 15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관객들의 열띤 앙코르 요청에 정 감독은 합창의 마지막 피날레를 다시 연주했다.

공연 뒤 정 감독은 담담한 표정으로 단원 80여 명의 등을 두드리며 일일이 악수를 건넸다. 순간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연주자들도 보였다. 앞서 단원들은 공연 직전 박현정 전 시향 대표를 비판하는 내용의 호소문을 관객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정 감독은 공연장을 나서면서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 일절 대답하지 않고 “연주, 오늘 너무 잘했어”라고만 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해피 뉴 이어”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했다. 이렇게 시향의 정명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날 두 딸과 함께 온 관객 김모 씨는 “매년 송년 공연을 보러 오는데 갑자기 사퇴한다고 해서 너무 아쉽다”며 “정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연주자인 만큼 꼭 다시 돌아와서 연주를 들려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2005년 취임한 정 감독은 재임 10년간 시향의 음악적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지난해 국내 여건에 비해 과한 처우 문제와 박 전 대표와의 갈등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정 감독이 음악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자세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그는 29일 단원들에게 보낸 사퇴 편지에서 ‘문명사회에서 용인되는 수준을 넘는 박해가 일어나는 건 한국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 ‘여태껏 살아왔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 등의 표현을 쓰기도 했다.

한 누리꾼은 “그의 연주는 국보급이고 그런 지휘자가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럽지만 음악 이전에 인간적 겸손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재계약 여부와 관계없이 내년 9회의 시향 공연을 지휘하기로 한 약속을 깬 것도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정 감독의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지평은 29일 보도자료를 내고 “정 감독의 부인은 허위사실을 날조하도록 사주한 게 아니라 피해자인 직원들의 피해 구제를 돕기 위해 조언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박 전 대표는 30일 기자들에게 ‘인간·음악가·한국인 정명훈 선생님께’라는 제목으로 보낸 e메일에서 “정 감독이 서울시향 단원 여러분이 지난 10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 한 사람의 거짓말에 의해 무색하게 되어 가슴이 아프다고 한 것은 저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다시 한 번 인격살인한 것”이라며 “정 감독이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고 했으니 10개월 넘게 유럽에 계신 부인 구순열 씨도 귀국해 경찰 조사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정명훈#마에스트로#서울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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