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조선판 미슐랭 가이드 ‘효전산고’… “평양 비계요리, 입안서 얼음녹듯”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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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교수, 첫 분석
“종로의 돼지고기 맛이 좋아… 메밀면은 관서지방이 최상
평안도 담배, 꿀 적셔 피워야” 팔도 음식-기호품 묘사 생생

“서울에 살 때 일찍이 미식(美食)을 찾아 먹었는데 침교(沈橋·현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파는 돼지고기가 가장 맛이 좋아 서경(평양)의 오수집 돼지국과 같았다. 서경에서는 기름진 비계가 손바닥처럼 두꺼운데 설편(雪片)처럼 얇게 잘라 입에 넣으면 얼음이 녹듯 했고, 불에 구워도 천하일미라고 할 만했다….”

조선후기 문인이자 관리였던 효전 심노숭(1762∼1837)이 자신의 문집 ‘효전산고(孝田散稿)’에 쓴 음식 품평이다. 당시 돼지국밥 요리로 유명했던 서울과 평양의 두 음식점을 언급하면서 조리 방식을 눈송이에 빗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얼핏 한가하게 식도락을 즐기면서 쓴 글 같지만, 효전이 이 글을 남긴 시기는 노론 벽파와 시파의 당파싸움에 얽혀 기장현(부산)으로 유배를 간 1801∼1806년 사이였다. 효전은 지방수령을 두루 역임한 관료로 로맨틱한 서정시를 여럿 남긴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가 서경의 돼지국밥을 떠올린 것은 유배지 근처에 사는 동네사람이 제사음식으로 돼지고기를 돌린 직후였다. 유배를 와서도 음식에 집착하는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웠을까. 그는 이 글 말미에 “궁지에 처한 사람이라 음식 생각이 가장 많아서 이렇게 말하니 우스운 일이다”라고 자조했다.

조선판 ‘미슐랭 가이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효전의 음식 기록에 대한 첫 연구논문이 최근 나왔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18·19세기의 음식 취향과 미각에 관한 기록’ 논문을 동방학지에 최근 발표했다. 성리학적 도덕규범에 얽매여 일상의 욕구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을 꺼리던 조선시대에 효전산고처럼 다양한 음식 맛을 기록한 문집은 극히 드물다. 효전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지방의 음식 맛을 비교하는 시와 산문을 썼다.

유배조차 음식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일본 열도와 가까운 기장의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일본제 난로를 어렵사리 구한 뒤 쇠고기를 즐겨 구워먹었다. 그것도 모자라 본가에서 음식을 잘하는 여자 노비를 데려오려고 했다. 일이 여의치 않자 자신이 가르치던 서동(書童) 중 한 명에게 서울식 요리법을 직접 가르쳐 전속 요리사로 삼았다.

그는 메밀 면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평양냉면을 으뜸으로 꼽았다. 효전은 “메밀 면의 품질은 관서지방이 최상으로, 차게 조리한 냉면이 한층 맛있다. 서울 냉면은 뜨겁게 조리한 온면보다 못하다. 며칠 사이 한 번이라도 메밀 면을 먹지 않으면 기분이 즐겁지 않다”고 했다.

냉면 마니아였던 효전은 심지어 여행 도중 사찰에서 직접 냉면을 만들어 먹기까지 했다. 1818년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한동안 좋아하는 면을 먹지 못하자, 관아와 식당을 샅샅이 뒤져 국수틀이 있는 월정사를 찾아냈다. 그날 밤 스님들을 불러 모아 메밀가루로 면을 뽑아냈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던 듯하다. 효전은 “메밀가루가 마치 모래를 씹는 듯하여 냉면이든 온면이든 모두 수제비처럼 뚝뚝 끊어졌다. 이것을 어떻게 먹으랴. 메밀의 품질이 관서지방에 미치지 못한다”고 적었다.

미각에 대한 갈망을 숨김없이 드러낸 효전의 글은 읽을수록 입에 착 달라붙는다.

“먹고 싶은 음식을 보면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이고 식욕이 동해 군침이 고였다” “기름장을 둘러 불에 구운 산적은 내가 몹시 즐기는 것으로 3년을 맛보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한번 배불리 먹었다” “나는 근일에 시루떡 생각이 간절했다”는 식의 표현이 곳곳에 등장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일부러 논하지 않은 다른 양반 문집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솔직한 내용이다.

효전은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와 차 같은 기호품도 제대로 즐겼다. 당시 최고급 담배로 통한 평안도 담배 ‘서초(西草)’를 꿀에 적셔 피웠고, 일본 담배까지 따로 구했을 정도였다. 또 청나라에서 수입한 황차(黃茶)를 자주 마시기도 했다.

안 교수는 “효전산고는 18세기 조선사회가 금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욕망을 추구하고 소비를 과시하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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