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성원용] 사모곡-어메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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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년 11월 5일 16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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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21시 15분 권태교 할머니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의사의 말이 어렴풋하면서 평온한 어메의 모습이 영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임종 이틀전에 아내가 낮에 꿈을 꾸었다. 시동생이 재봉틀 머리를 들고 있다가 떨어 뜨렸는데, 그것이 백찜(백설기) 떡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아들 며느리, 그리고 딸들이 그것을 즐겁게 나눠 먹었단다. 그때는 그렇게 의미있게 들리지 않았는데, 돌아 가신 당일 조카가 의사 얘기를 전하면서, 어머님께서 심상치 않다고 한다. 허둥지둥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 꿈 얘기가 생각나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재봉틀 머리는 어메에게는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버님께서 교원 노조활동으로 옥고를 치르실 때 집안 생계를 꾸려 왔던 어머님의 재산목록 1호 였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유언이 없으셨다. 생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셨던 듯하다. 보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말씀, 모두 정리된 뒤였다. 큰아들인 내가 대구에 정착하기 위해 최근에 새로 산 집에 와 보시고는 그렇게 흡족해 하셨다. 서울서 봉급생활을 한 내가 은퇴후에 어떻게 살아 갈까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누워서 높은 천장을 보시고는 아이구 좋다 하시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으셨던지 그날 점심은 어머님께서 고집해서 쏘셨다. 그때가 여름 좀 지나서 였으니까 불과 돌아 가시기 두달전 쯤이다. 마침, 첫 월급(노령연금)을 타셨다고 활짝 웃으시면서, 돈봉투를 보여 주셨는데, 20만원과 10만원 짜리, 그렇게 두개를 준비하셨다 어머님을 포함해서 나와 아내, 그리고 대구서 생활하는 둘째 내외, 둘째 누님해서 모두 7명이었는데, 20만원으로는 조금 부족할 듯도 해서 10만원 짜리를 하나 더 준비하셨단다. 그래서 우리는 한참 웃고 즐거워 했다.
통도 크고 준비성도 철저한 분이셨다.

어머님과 우리 세아들은 유난히 친하게 지냈다. 만나면 웃음 꽃이 피었다. 명절에는 고스톱도 치고, 서로 속이고 장난치고 하면서… 그래서 인지, 사실 나는 그렇게 애통하거나 하지는 않다. 그립기만 하다. 나는 결혼후 부터는 어머님, 아버님을 어메, 아배라고 불렀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그게 편하고 자연스럽다. 특히 나와, 대구은행 부행장으로 재직하는 내 동생 무용이는 어메를 베개삼아 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웃고 농담하면서, 우리는 박자도 잘 맞았다. 어메는 그런 분위를 무척 좋아하셨다.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인 추석전 까지도 그랬다. 내일 모레면 환갑 나이인데도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내가 병실에 들어서면 우리 아들 온다고… 원용아 하고, 어디서 그렇게 기적 같은 힘이 생기셨는지 두팔을 들고, 환하게 반기셨다. 어메가 보고 싶다.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난다.

어머님은 리더십이 뛰어난 분이셨다. 그 바쁜 농사철에도 우리 집에는 동네 상일꾼들이 항상 오고 싶어했고, 자기 일같이 우리 집 일을 도우곤 했다. 인심도 후하셨다. 그들에게 생일날 미역국과 결혼 선물까지 챙기셨던 분이다. 내가 시골 국민하교에 다닐때는 학교 어머니 회장을 하셨는데 운동회 때 단상에 서서 연설하시는 어머니 모습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돌이켜 보면 강직하셨던 아버님 보다는 어머님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집안이 꾸려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20여리 떨어져 있던 국민학교까지 통근을 하셨고,
휴일이면 대소가 문중 일에 더 비중을 두셨던 탓에 집안 일을 챙기지는 못하셨다.

우리는 간병인 들과도 가족같이 지냈다. 경북대 본원에서 칠곡으로 옮길 때도, 집에 계실때 간병사가 다리가 아파서 그만둘 때도 그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아쉬워했다. 명절 때는 그만둔 간병인들이 과일 상자를 사들고 어머님께 인사를 왔고, 심지어 나한테 까지 선물을 보낸다고 해서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한 간병인은 장례식장에서 너무 울어서 주변을 숙연하게 하는가 하면, 나중에 부의금을 20만원이나 한 것을 보고, 조금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또 한 간병인은 낮에 문상와서 밤 10시가 넘어서야 돌아 갔다. 가족같이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이다. 보답을 해야 겠다. 모두가 감사하다. 우리 어메의 인덕도 한 몫을 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님은 평소 주변에 넉넉하게 베푸셨지만, 자식 잘 되길 바라는 욕심 만큼은 남달랐다. 일평생을 꿋꿋하게 버틴 힘이 아니었을까. 어메를 선산에 모시던 날 그렇게 날씨가 화창했다. 그리고, 삼우제 다음날 부터는 가을비가 뿌렸다. 묘소 잔디에 물이 흠뻑 뿌려질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묘소도 어메가 평소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셨던 곳이다. 좌로 팔공산부터 우로 보현산 천문대 까지 병풍같이 한눈에 펼쳐진다. 어머님을 모시고 보니까 주변의 할머니, 아버님 묘소까지 훤하게 단장되었다

어머님은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 그 어렵던 시절에 6남매 모두 대학 보내면서 번듯하게 키워내신 것만으로도 존경받아야 한다. 내가 어메 만큼 알차고 의미있게 인생을 살수 있을까 싶다.
힘이 겨울때면 어메를 그리면서, 마음을 다잡아야 겠다. 한참은 더 노력해야겠다.

어메가 보고 싶다.

성원용 전 GS건설 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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