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지원받아 교과서 찍던 한국… 이젠 저개발국 교육-인재양성 원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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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한국委 30일 창립 60돌

1954년 한 농촌에서 어린이들이 유네스코 학생건설대 대원의 지도 아래 땡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앉아 자못 진지하게 시험을 보고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제공
1954년 한 농촌에서 어린이들이 유네스코 학생건설대 대원의 지도 아래 땡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앉아 자못 진지하게 시험을 보고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제공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60(현 동작구 대방동 502)에 1954년 새 건물이 들어섰다. 대한문교서적㈜ 인쇄공장. 햇빛이 잘 들어오고 공기순환도 잘 되는데다 유지비까지 적게 드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대지 면적 6022평에 건평 730평으로 당시로서는 꽤 크고 색다른 모습이어서 눈에 확 들어왔다. 설계는 그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설계사무소를 개설한 일본 유학파 김태식이 맡았다.

9월 16일 이승만 대통령과 이선근 문교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쇄공장 낙성식이 열렸다. 이 대통령은 캐다나 출신 인쇄 고문(顧問) 벤저민 로스웰의 안내로 공장 내부를 둘러보고 인쇄돼 나온 교과서도 살펴봤다. 이 공장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고속윤전기, 자동 활판기, 오프셋 인쇄기, 활자 제조기, 사진 식자기 등 70여 대의 인쇄 장비가 들어앉았다. 당시 언론은 동양에서 으뜸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평가했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만들려고 세운 이 인쇄공장은 연간 3000만 부를 찍을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은 유엔한국재건단(운크라·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이 전란으로 황폐화한 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재건사업에 착수한 뒤 처음으로 가시적 성과를 낸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존 콜터 단장에게 표했다. 콜터 단장은 1950년 포항 전투 때 미 육군 9군단을 지휘해 승전을 이끌어낸 인물로 미8군 부사령관을 지냈다. 독립운동을 했던 이 대통령은 인쇄 시설이 모두 일본제인 것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했다.

● 피란지 천막교실에 교과서 공급

이 인쇄공장을 짓는데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10만 달러, 운크라가 14만 달러를 지원했다. 당시 한국은 전근대적인 농업 중심 국가로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 정도였다. 한 달을 채 6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입에 풀칠하며 근근이 살았다. 국민소득 세계 순위 109위로 북한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못사는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상태에서 3년 넘게 전쟁을 치렀으니, 생활이라고조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삶은 비참했다. 6·25전쟁으로 500만여 명이 죽고 이산가족 1000만여 명이 발생했다. 국토의 95%, 건물의 85%, 산업시설의 60%가량이 잿더미로 변했다.

한국이 먹고 살려면 생필품과 산업재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달러로 무역 대금을 결제해야 하는데 늘 모자랐다. 김, 오징어 등 수산물과 텅스텐, 흑연 등 약간의 광물 수출이 전부였다. 만성적인 무역 적자 상태였다. 제조업은 수출은커녕 국내 소비도 충당하지 못할 만큼 열악했다. 달러를 쓰려면 '외환 사용 신청서'가 필요했다. 대통령의 재가 없이는 단 몇 달러도 쓸 수 없는 시절이었다. 재무부 장관이 재량으로 교환해 줄 수 있는 한도가 100달러였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열은 그때도 대단했다. 피란지에서 천막교실을 만들어 학교 교육을 계속했다. 정부도 '전시하 교육 특별조치 요강'을 발표하고 '전시 교재' 발행에 나섰다. 교과서와 학습 참고서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그러나 출판에 필요한 인쇄와 제본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용지는 절대량이 모자랐다.

그런데 인쇄공장이 가동된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교과서를 적기에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전후 초등학교 교육은 빠른 속도로 정상화돼 갔다. 전쟁의 참화와 굶주림에 허덕이던 학생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배움을 계속했다. 이런 교육 재건을 토대로 한국이 문맹 퇴치와 경제 개발에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반기문 총장 "이 책으로 공부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12년 11월 유네스코를 방문한 자리에서 책 한 권을 기증했다. 1956년 출간된 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자연' 교과서였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실제 사용했던 이 교과서의 앞표지에는 남녀 어린이 2명이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 건물 1층 로비에 전시돼 있는 이 책의 뒤표지 안쪽에는 특별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금번에 유네스코와 운끄라에서 인쇄기계의 기증을 받아, 국정교과서 인쇄전속공장이 새로 생겼는바, 이 책은 그 공장에서 박은 것이다. 문교부 장관'

반 총장은 '자연' 교과서를 기증하며 "이 책으로 공부했기에 오늘날의 한국이 있다"며 유네스코가 전후 한국의 교육 재건을 위해 헌신해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만든 교과서로, 전쟁 통에 교실이 없어 천막에서 공부했던 코흘리개 소년이 성장해 유엔의 최고 지도자가 됐다는 의미였다.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스토리를 전해들은 유네스코 사무국 직원들은 자긍심을 느끼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 전후 수복지구에 학생건설대 파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설립 초기 '큰집'인 유네스코의 뜻에 따라 국내에서 발전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뒀다. 먼저 농촌 지역사회 개발에 나섰다. 1954년 대학생으로 구성한 학생건설대를 전후 수복(收復)지구인 강원 간성 연천 화천과 서울 교외에 보냈다. 학생건설대는 '모범촌'을 건설하고 주민에게 문자 교육, 영농 지도, 의료봉사 활동을 했다. 1956년에는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경기 수원시 서울대 농대 캠퍼스에 신생활교육원을 설립했다.

해외 유학을 떠나려는 인재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1957년 서울대에 한국외국어학원을 운크라와 함께 개설했다. 달러가 부족한 사정을 감안해 지식인들이 외국의 학술 간행물과 과학 기자재를 구입할 수 있도록 1961년 쿠폰을 발행했다. 이 쿠폰은 유네스코가 1948년 창안한 국제통화로 국제거래에서 달러처럼 쓰였다. 1961년에는 인하공대에 중앙종합직업학교를 개설하고 전문가를 파견해 직업기술 교육을 펼쳤다.

평화를 위한 교육에도 나섰다. 학교 교육을 통한 평화 전파와 국제협력을 도모하는 협동학교사업(ASP)에 1960년 참여했다. 국제이해교육이 한국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초창기에는 유엔체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기구와 외국 문화를 소개하고 해외 신지식과 정보를 제공했다.

● 지구촌에 희망을 나누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는다. 한국은 1950년 6월 14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5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표결을 거쳐 55번째 회원국이 됐다. 열하루 뒤 6·25전쟁이 발발해 창립총회는 정전 뒤인 1954년 1월 30일 서울대 강당에서 열렸다. 냉전체제 탓에 한국이 유엔에 가입할 수 없던 상황에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세계와 연결하는 좁지만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은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이 됐다. 최빈국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하는 공여국이 된 것이다. 이는 세계 역사상 첫 사례다. 한국의 DAC 가입은 경제 사회 발전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은 만큼 되돌려 줄 때가 됐다는 의미다. 국제사회는 "한국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는 유일한 국가"라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이런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응해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이 높은 네팔 부탄 파키스탄 등 서남아시아 저개발국 농촌지역에서 학업 중단 청소년과 성인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소득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세종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르완다 말라위 잠비아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문자 해독과 직업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남북한 화해와 협력에 기여하기 위해 2002년부터 2009년까지 북한에 교과서 발행에 필요한 인쇄 시설과 용지를 공급했다. 이 사업은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된 상태다. 그러나 이 사업 모델은 60년 전 우리가 유네스코로부터 받았던 도움을 남에게 되돌려주는 현대버전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저개발국에 유치원, 직업훈련센터, 마을회관 역할을 하는 지역학습센터를 수십 개 세울 계획이다. 이들에게 식량과 의료를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립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려면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2월 3일 오후 4시 30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당신이 유네스코입니다'를 슬로건으로 창립 60주년 기념 및 비전 선포식을 갖는다. 행사에는 유네스코 첫 여성 사무총장인 이리나 보코바 총장이 참석한다. 보코바 총장은 2010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2011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세계인문학 포럼'에 참석했고, 2012년 8월에는 비무장지대와 붙어있는 경기 파주시 통일촌 군내초등학교를 방문해 평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박근혜 대통령이 서유럽 순방차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도 접견했을 정도로 보코바 총장은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다.

민동석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은 "창립 60주년을 계기로 국민과 함께하는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겠다"며 "앞으로 저개발국 교육 지원, 차세대 글로벌 인재 양성,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사업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
#유엔#유네스코 한국위원회#창립 60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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