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쩔뚝이’ 발언에… 좌우 이념갈등 폭발한 인터넷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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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용팝 반년전 동영상 싸고 시끌

걸그룹 ‘크레용팝’의 소속사가 지난해 11월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의 한 장면. 커피를 배달하는 한 멤버에게 다른 멤버가 “쩔뚝이”라고 말해 논란이 됐다. 유튜브 동영상 캡처
걸그룹 ‘크레용팝’의 소속사가 지난해 11월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의 한 장면. 커피를 배달하는 한 멤버에게 다른 멤버가 “쩔뚝이”라고 말해 논란이 됐다. 유튜브 동영상 캡처
15일 인터넷에선 또다시 좌우파 간에 치열한 이념전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발단은 사소하고 이념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일이었다.

“쩔뚝이 아니에요?”

5인조 걸그룹 ‘크레용팝’의 멤버 웨이(24)가 8개월 전에 내뱉은 한마디다. 크레용팝 소속사인 크롬엔터테인먼트는 매주 일요일 ‘크레용팝TV’라는 제목으로 연습 장면이나 소소한 에피소드를 보여 주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다. 소속사는 웨이의 발언이 포함된 6분 42초짜리 동영상도 지난해 11월 17일 유튜브에 올렸다. 크레용팝은 2012년 ‘Saturday Night’로 데뷔했다.

동영상을 보면 멤버 초아(24)가 다른 멤버에게 커피를 주기 위해 “커피 배달이오”라고 말하며 쩔뚝거리며 걸어온다. 이때 화면에 잡히지 않은 멤버 웨이가 “쩔뚝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게 들린다.

이 발언이 왜 문제가 됐을까. 15일 오전 11시경 모 스포츠신문 인터넷 사이트에 ‘크레용팝 이번엔 쩔뚝이 발언 논란’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그러자 누리꾼들이 이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 ‘크레용팝 입단속 좀 시키세요’, ‘일베단어나 써 대는 일베충 크레용팝 꼴 보기 싫다’, ‘크레용팝이 아니라 일베팝’, ‘빼도 박도 못 하고 일베충 인증 쓰레기’ 등의 인신공격성 트윗이 줄을 이었다. ‘일베와 관련없다’는 본인의 해명에도 아랑곳없이 ‘크레용팝 일밍아웃(일베 회원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을 일컫는 은어)’ 등 웨이를 일베 회원으로 넘겨짚는 내용도 올라왔다.

일부 누리꾼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쩔뚝이’라는 비속어가 극우 성향으로 알려진 인터넷 사이트 ‘일간 베스트 저장소(일베)’에서 한 전직 대통령을 비하할 때 쓰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 누리꾼은 “웨이가 OOO 전 대통령을 욕되게 했다”며 비난했다. 유명 인터넷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에는 ‘크레용팝 갤러리’까지 생겼고 9시간 만에 600개가 넘는 글이 올라왔다. ‘크레용팝은 보수의 사람’이라는 글부터 ‘××년’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올라왔다.

반대로 일베 게시판에는 ‘크레용팝을 구하자’는 글이 올라왔다. 평소 일베에는 OOO 전 대통령을 적대시하는 게시물이 많이 올라온다. 일베 회원들은 크레용팝 갤러리로 우르르 몰려가 크레용팝을 옹호하는 내용의 글을 도배(같은 글을 계속 반복해서 올리는 것)했다. 다른 회원들은 웨이 등 멤버 사진을 퍼 나르거나 ‘의리로 크레용팝 노래 계속 듣고 있다’, ‘하는 행동이 점점 마음에 든다’는 등의 글을 올렸다. 같은 시각 포털 네이트에선 크레용팝이 6월 발표한 신곡 ‘빠빠빠’가 급상승 인기곡 1위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크레용팝의 소속사 측이 ‘노이즈 마케팅’을 위해 이슈를 만든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논란이 일자 소속사 관계자는 “8개월 전 영상인데 오늘 갑자기 기사가 떴다”며 “크레용팝에는 일베 회원이 없다”고 밝혔다. 국어사전에는 ‘쩔뚝이’가 ‘절뚝발이의 센 말’이라고 나온다. 절뚝발이는 한쪽 다리가 짧거나 탈이 나서 다리를 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념과는 무관한 사안을 놓고 좌파 성향으로 추정되는 누리꾼들과 일베 회원들 간에 격렬한 온라인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 이념 갈등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마치 폭발성 가스로 가득 찬 방처럼 사소한 인화성 물질만 유입되어도 이념 갈등의 불꽃이 점화되어 버리는 상태라는 지적이다.

이원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터넷 여론에서는 보수적인 의견이 소수에 불과했고 진보적인 여론이 90%를 넘게 차지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일베’가 이런 불균형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지난해 대선 때 규모를 키우며 5 대 5의 싸움이 됐다”며 “쉽게 말해 ‘싸움이 되는 상태’가 됐다”고 분석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부 교수는 “연예인 등 셀러브리티(유명인사)의 말 한마디를 두고 이런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일종의 ‘내 편을 확인하는 행동’”이라고 분석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근거가 있거나 가치관이 반영된 논쟁이라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 인터넷의 싸움은 저열한 막말과 인신공격으로 얼룩졌다”며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고 무조건 비난부터 쏟아 내는 행동은 서로에게 상처만 준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구태가 기름을 부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회에서 면책특권을 남용한 막말과 욕설, 인신공격이 난무하면서 사회의 이념적 골이 깊어지고 온라인에서 누리꾼들이 그 골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은택·곽도영 기자 nabi@donga.com
#크레용팝#좌우이념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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