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털어버리고 김치∼” 난 행복 찍는 가족사진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27일 03시 00분


■ 곡절 많은 가정에 3년째 무료 사진봉사 김진철 씨

어려운 가족 수백 명의 사진을 무료로 찍어준 ‘천사 사진사’ 김진철 씨는 정작 본인이 피사체가 되는 것에는 익숙지 않았다. 25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모다스튜디오에서 김 씨가 사진을 찍을 때처럼 카메라와 ‘웃음 유발용’ 딸랑이를 들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어려운 가족 수백 명의 사진을 무료로 찍어준 ‘천사 사진사’ 김진철 씨는 정작 본인이 피사체가 되는 것에는 익숙지 않았다. 25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모다스튜디오에서 김 씨가 사진을 찍을 때처럼 카메라와 ‘웃음 유발용’ 딸랑이를 들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 누군가에겐 마지막 가족사진이다. 지난달 사진관을 찾은 A 씨(41·여)가 그랬다.

그녀는 2007년 겨울 아이들에게까지 주먹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세 남매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겨울바람을 피해 쉼터에 몸을 맡겼지만 남편은 부엌칼을 들고 찾아왔다. 친구, 친정과도 연락을 끊고 서울의 한 단칸방으로 숨었다.

친구를 사귈 만하면 도망치듯 학교를 옮겨야 했던 아이들은 엇나갔다. 열아홉 큰딸은 학교를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 열여섯 큰아들은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가 됐다. 열세 살 둘째 딸은 아빠가 꿈에 나오면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A 씨는 2010년 재혼해 막내아들 성호(가명·2)를 낳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호가 방긋 웃으면 언니 오빠 얼굴도 밝아졌다. 하지만 A 씨와 세 남매는 다음 달부터 성호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 헤어지게 된 두 번째 남편이 성호를 데려가기로 해서다. A 씨는 성호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4남매와 가족사진을 찍고 싶지만 비싼 탓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회가 찾아왔다. 둘째 딸을 후원하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가족사진을 무료로 찍어주는 사진사를 소개해 준 것. “서로 친한 척 좀 하세요. 안 친한 거 티 나요.” 사진사 김진철 씨(39)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이들 표정이 환해졌다. 이들의 눈부신 순간이 카메라에 담겼다. A 씨는 “성호를 보고 싶을 때마다 들여다볼 가족사진이 생겼다”며 뚝뚝 눈물을 흘렸다.

김옥연 할머니(오른쪽)가 필리핀에서 온 며느리, 아들, 손주와 함께 25일 생애 첫 가족사진을 찍었다. 김진철 씨 제공
김옥연 할머니(오른쪽)가 필리핀에서 온 며느리, 아들, 손주와 함께 25일 생애 첫 가족사진을 찍었다. 김진철 씨 제공
#. 누군가에겐 첫 가족사진이다. 25일 이 사진관에 온 김옥연 할머니(77) 얘기다. 김 할머니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노총각 딱지를 달고 사는 아들이 답답했다. 노인정 친구들이 손자 사진이라도 자랑하듯 내보이는 날에는 아들과 단둘이 사는 집이 더 휑했다.

‘거실에 가족사진 한 장 걸었으면….’ 아들 이장환 씨(51)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김 할머니의 소원이었다.

그랬던 할머니의 얼굴에 요즘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2009년 새 식구가 된 필리핀 며느리가 작년과 올해 연이어 손녀와 손자를 안겨 줬기 때문이다. 3년 만에 가족이 5명으로 늘어났다. 김 할머니는 “생애 가장 행복한 나날을 사진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 그는 렌즈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피사체는 화려한 풍광이나 웅장한 건축물이 아니다. 골목길 어디서나 마주치는, 다소 생활에 찌든 가난한 이웃들이지만 가족이라는 ‘마법 같은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매달 넷째 주 목요일이면 형편이 어려운 가족들의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는 봉사활동을 해 온 지 3년째. 지역 복지관과 다문화센터의 도움을 받는 가족 중 어린이재단이 추천한 이들의 사진을 찍어 준다. 그동안 그의 액자 선물을 받은 가족이 60가정을 넘었다.

가족사진 액자는 하나에 30만∼50만 원이지만 이들에겐 돈을 받지 않는다. 일반 고객의 예약이 두 달 치씩 밀려 있을 정도로 바쁘지만 봉사를 거른 적도 없다. 높은 가격뿐 아니라 세상에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가족사진을 피했던 이들에게 다시 세상에 나올 용기를 주는 게 기뻐서다. “세상 모든 가족이 집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힘냈으면 좋겠다”는 김 씨는 다음엔 어떤 가족에게 행복을 전해 줄지 벌써 설렌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무료 가족사진#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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