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12년전 사망 처리된 사기꾼, 유령회사 차려 수억 가로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15일 03시 00분


3일 밤 서울 강남구 개포동 수서경찰서에 흥분한 중년 남성 조모 씨와 박모 씨가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는 선해 보이는 50대 남성의 멱살이 잡혀 있었다. 사기를 당했다는 두 사람은 몇 달을 추적해 강남구의 한 주택 월세방에 숨어 지내던 이 남성을 붙잡자마자 경찰서로 끌고 온 것이다. 50대 남성은 경찰에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대고 지문을 찍었다. 하지만 지문은 주민번호에 등록된 게 아닌 2000년 사망한 안모 씨(53)의 것이었다. 12년간 유령으로 살며 사기행각을 벌인 안 씨에게 족쇄가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1988년 결혼한 안 씨는 부인과 아들을 낳아 키우며 평탄하게 살았다. 부산의 한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잘나가는 공기업에 취직도 했다. 하지만 1993년 퇴직 후 시작한 건설사업이 내리막길을 타면서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빚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1995년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 부인은 실종 신고를 했고 민법에 따라 신고 5년이 지난 2000년 12월 안 씨는 서류상 사망 처리됐다.

유령이 된 안 씨는 사기꾼으로 다시 태어났다. 안 씨를 잡아온 두 남자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순하게 생겨가지고 진짜 타고난 사기꾼이다”라고 했다. 경찰이 확인한 것은 2009년 이후의 사기행각이다. 안 씨는 사회생활을 하다 만난 대학 동창의 명의를 빌려 경기 남양주시에 껍데기뿐인 건설회사 법인을 차렸다. 이 동창은 안 씨가 ‘죽은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고 대가도 없이 명의를 빌려줬다. 안 씨는 타고난 언변과 회사 명함 한 장만으로도 돈을 투자받았다. 그는 “경북 포항, 경남 사천 일대에 사업단지가 조성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도심형 생활주택 사업이 인기인데 곧 대박이 난다”는 말로 거액을 투자받은 뒤 잠적했다.

안 씨를 붙잡아 온 피해자들은 “월셋집 주인과 한 번 들른 식당 주인에게도 돈을 빌릴 정도로 언변이 뛰어났다”고 혀를 내둘렀다. 안 씨의 실명을 알게 된 한 피해자가 지난해 수사기관에 신고했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망자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하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안 씨는 “사망자로 살아도 불편한 점이 없더라”고 했다. 다른 사람 명의의 건강보험증과 휴대전화를 썼고 12년 동안 불심검문도 당하지 않았다. 운전은 절대로 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경찰은 안 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 송치했다고 14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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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사기꾼#유령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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