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살인의 추억에… 여성들 ‘아웃도어 열풍’ 급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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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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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4시경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올레 2코스의 방죽길. 평소에는 혼자 걷는 여성이 많았지만 이날은 표지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귀포=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25일 오후 4시경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올레 2코스의 방죽길. 평소에는 혼자 걷는 여성이 많았지만 이날은 표지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귀포=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서울에서 대기업 유통회사에 다니는 이원아 씨(28·여)는 다음 달에 여름휴가를 내서 혼자 제주 올레를 탐방할 계획이었다. ‘나 홀로 여행’을 위해 토시와 스카프, 가방과 신발까지 새로 장만했고 비행기표 등도 벌써부터 예약했다.

하지만 이 씨는 25일 예약을 모두 취소했다. 휴가는 부모님을 따라가기로 했다. 최근 제주 올레와 경남 통영에서 벌어진 여성 피살 사건의 영향이다. 이 씨는 “부모님이 만류하시는 데다, 아직은 안전대책이 충분한 것 같지 않아 당분간 혼자 여행 가는 것은 포기했다”고 말했다.

여성을 노린 강력범죄 빈발로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퍼지면서 홀로 여행하거나 밤에 외출하는 것을 피하는 여성이 크게 늘고 있다. 최근 수년간 ‘혼자가 더 편하다’는 모토가 확산되면서 확장되어 온 여성들의 적극적인 여가 추구 문화가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 인적 사라진 올레

25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광치기해변 근처에 있는 올레 2코스. 평소 같으면 홀로 사색에 젖은 채 걷는 여성들이 숱하게 지나는 길이다. 예년 이맘때면 오후 시간대에 평균 40여 명의 올레꾼이 찾곤 했다. 하지만 이날은 혼자서 온 여성 관광객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길안내 자원봉사를 하는 고덕순 씨(69·여)는 “3시간 동안 짝을 이룬 여자 2명과 혼자 여행하는 남자 1명 등 3명만 이곳을 찾았다”며 “평소 2코스에는 혼자 걷는 여성이 많은데 1코스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 뒤로는 혼자 다니는 여성은 없다”고 전했다.

25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인터넷 게시판에는 올레 여행을 취소하겠다는 글이 쏟아졌다. 주민정 씨(23·여)는 트위터에 “제주 올레에 혼자 갈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다. 부모님과 (휴가를) 보내고 와야겠다”는 글을 남겼다. 김모 씨(23·여)도 “제주 올레 코스를 중심으로 스케줄을 짰는데 무서워 갈 수가 없다”며 “숙박 예약도 취소했다”고 했다. 제주시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박모 씨(41)는 “이맘때에는 9월까지 예약이 꽉 찰 정도로 문의가 많은데 살인사건 이후 예약이 확 줄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 도심 밤 공원도 산책 여성 드물어


24일 오후 10시경 찾은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에는 혼자 산책을 하는 여성이 단 한 명뿐이었다. 평소 이곳은 치안 여건이 좋아 밤늦은 시간에도 혼자 운동하는 여성이 많은 곳이다.

이날 오후 11시경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도 홀로 운동을 하는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 아르바이트와 학원 수강을 마치고 보라매공원에서 밤에 운동하는 게 낙이었다는 대학생 최지현 씨(20·여)는 “얼마 전 한 남성이 몸을 만지고 달아난 적이 있어 밤길 나서기가 불안했는데 살인사건 소식을 듣고 나니 더 무서워 밤길에 집 밖을 나서는 것 자체가 무섭다”고 말했다.

이처럼 불안감이 스며들면서 꾸준히 범위를 넓혀 온 여성들의 대외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00년대 후반부터 등산과 트레킹 등 아웃도어 활동이 20, 30대 여성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여성들의 ‘집 밖’ 활동의 범위를 더욱 넓혀 왔는데, 연이은 강력사건이 여성들을 다시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잇따른 강력범죄는 국민들의 야외 활동을 축소시켜 경기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며 “개인 측면에서도 불안감 때문에 취미 활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허경미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여성들의 경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행복추구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일련의 강력사건들이 이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서귀포=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올레길 살인사건#여성#아웃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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