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폭력 남편과 맞서 싸울때만 정당방위라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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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남편과 맞서 싸울때만 정당방위라니…
‘40년 학대’ 남편 잠든 후 살해한 아내, 2심서도 중형
딸 “그 고통, 법이 너무 몰라”

40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A 씨(65·여)는 항소심에서도 중형을 피하지 못했다. 서울고법은 20일 피고와 원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해 A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2심 재판부 역시 가정폭력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남편이 잠들어 있을 때 살해한 것은 정당방위가 아니라고 판시했다.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급박한 위협이 없었다는 것이다.

▶본보 6월 28일자 A8면
남편 살해 부른 가정폭력… 모녀의 SOS, 아무도 듣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난해 8월 남편은 A 씨에게 “눈을 찔러 소경을 만들까, 배를 난도질할까”라며 부엌칼을 휘둘렀다. A 씨가 애원한 끝에 남편은 방 돗자리 아래에 칼을 넣고 그 위에서 잠들었다. 다리 한쪽을 아내 배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A 씨는 ‘나가면 죽인다’는 협박을 받은 터라 한동안 가만히 있다 넥타이로 남편의 목을 졸랐다.

남편이 칼부림을 멈추고 잠자는 무방비상태였기 때문에 A 씨의 행위는 정당방위가 아닌 명백한 살인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정 불안하면 이웃이나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합법적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점도 고려됐다.

하지만 가정폭력 전문가들은 ‘침해의 현재성’이란 정당방위의 일반적 기준을 가정폭력 사건에 그대로 적용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남편이 폭행하는 동안 아내가 물리적 저항을 하는 건 죽을 각오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장기간 학대를 당한 여성은 남편 눈빛 하나에도 과거 폭력의 기억이 되살아나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며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실제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피해자는 주변의 무관심 속에 외롭게 폭력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사적 구제’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절박감에 극단적 선택을 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법원은 당장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정당방위가 쉽게 인정되면 범죄자들이 고의로 살인하고도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게 뻔해 어쩔 수 없었다’며 합리화하는 부작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재판이 가정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충분히 감안해 이뤄졌는지는 의심스럽다. 1, 2심을 거치면서 A 씨 변호인은 재판부에 가정폭력 전문가가 재판에 참여하도록 여러 번 건의했지만 번번이 기각됐다.

A 씨의 딸은 판사와 검사로부터 “왜 아버지의 폭력에 적극 대처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말문이 막혔다고 했다. “아버지의 주먹질이 시작되면 숨죽인 채 맞아야 하고 경찰에 신고했다간 끔찍한 보복을 당하는 게 어릴 때 터득한 이치인데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채널A 영상] 30년 가정폭력 견디다 못해…가족들이 아버지 살해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가정폭력#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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