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억 찾을 길도 실종자 행방도… 모두 묻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4일 03시 00분


■ ‘강남 부자 납치사건’ 범인 자살… 막막한 피해자들

본보 2008년 5월 22일자 A12면.
본보 2008년 5월 22일자 A12면.
지난달 18일 ‘강남 재력가 납치사건’ ‘말레이시아 한인회 부회장 실종사건’의 주범 김모 씨(53)가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그는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가족에게 실망시켜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들은 김 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의 길이 막혀 또 한 번 고통을 받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한 음식점에서 만난 사업가 A 씨(57)는 “해외도피 3년 만에 붙잡힌 김 씨가 납치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돈도 찾아 주리라 믿었다”며 “김 씨에게 건 기대가 큰 탓인지 마치 친구가 죽은 것 같다”고 말했다. A 씨는 2008년 김 씨와 대학동창 이모 씨(53·구속) 등에게 80여 일간 납치돼 100억여 원을 뜯긴 ‘강남 재력가 납치 사건’의 피해자다. 납치된 상태에서 폭행을 당하고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한 A 씨는 충격으로 은둔 생활을 해왔다. 사건 이후 처음으로 본지 기자와 만나 입을 연 A 씨의 코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고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채널A 영상] 100억은 어디에…‘강남 재력가’ 납치범 마카오서 덜미

A 씨가 김 씨를 친구에 비유한 것은 ‘대학동창 3인방’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다. A 씨는 대학시절부터 사업가인 이 씨 및 변호사 J 씨와 친했다. 부유한 A 씨는 이 씨의 사업이 힘들 때마다 금전적인 지원을 해줬다. 은혜를 모르는 이 씨는 A 씨 재산을 탐내고 김 씨와 짜고 납치 행각을 벌인 것이다. A 씨는 “김 씨가 해외로 도망가면서 이 씨가 모든 죄를 김 씨에게 미뤘다”며 “이 씨가 범행에 가담한 조선족 4명을 고용하고 마약을 구입한 것 같은데 이를 밝히지 못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A 씨는 사건 현장에는 없었지만 변호사인 J 씨도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있다. A 씨는 “J 씨가 범행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는데 증거가 없어 김 씨의 진술이 꼭 필요했다”며 “전과 17범인 김 씨는 원래 나쁜 사람이지만 오랜 우정을 배신한 친구의 죄는 꼭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씨의 죽음으로 80억 원도 찾을 길이 막막해졌다. 김 씨는 A 씨에게 마약을 투약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A 씨의 부동산을 담보로 H저축은행에서 80억 원을 대출받아 자신의 통장으로 옮겼다. 김 씨가 붙잡히기 전 H은행과 대출금을 두고 소송을 벌인 A 씨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대출한 돈이라 갚을 수 없다고 했지만 법원은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며 “오랜 공방 끝에 절반만 갚기로 결정이 났지만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A 씨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말레이시아 한인회 부회장 B 씨(54)의 가족이다. A 씨는 “김 씨가 B 씨를 죽인 게 분명하다”며 “나를 살려준 김 씨가 오히려 고맙다”고 말할 정도다. 김 씨는 지난해 10월 말레이시아에서 B 씨에게 접근했다. B 씨는 김 씨를 만난 날 실종돼 아직까지 행방불명 상태다. 경찰은 B 씨가 실종 직전 김 씨와 함께 있었던 정황 등을 증거로 김 씨가 B 씨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수사해왔다.

본보 2012년 3월 22일자 A14면.
본보 2012년 3월 22일자 A14면.
말레이시아에 있는 B 씨의 친척은 1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큰딸이 직장도 관두고 아버지 행방을 찾는데 집중했는데 김 씨가 죽어 시신이라도 수습할 길이 막혔다”며 “남은 가족은 말레이시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몇 달을 매달려 수사한 사건이지만 피의자가 없으니 종결할 수밖에 없다”며 “사망처리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B 씨 가족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사건범죄#사건사고#경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