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강남 재력가 납치사건’ ‘말레이시아 한인회 부회장 실종사건’의 주범 김모 씨(53)가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그는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가족에게 실망시켜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들은 김 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의 길이 막혀 또 한 번 고통을 받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한 음식점에서 만난 사업가 A 씨(57)는 “해외도피 3년 만에 붙잡힌 김 씨가 납치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돈도 찾아 주리라 믿었다”며 “김 씨에게 건 기대가 큰 탓인지 마치 친구가 죽은 것 같다”고 말했다. A 씨는 2008년 김 씨와 대학동창 이모 씨(53·구속) 등에게 80여 일간 납치돼 100억여 원을 뜯긴 ‘강남 재력가 납치 사건’의 피해자다. 납치된 상태에서 폭행을 당하고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한 A 씨는 충격으로 은둔 생활을 해왔다. 사건 이후 처음으로 본지 기자와 만나 입을 연 A 씨의 코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고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A 씨가 김 씨를 친구에 비유한 것은 ‘대학동창 3인방’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다. A 씨는 대학시절부터 사업가인 이 씨 및 변호사 J 씨와 친했다. 부유한 A 씨는 이 씨의 사업이 힘들 때마다 금전적인 지원을 해줬다. 은혜를 모르는 이 씨는 A 씨 재산을 탐내고 김 씨와 짜고 납치 행각을 벌인 것이다. A 씨는 “김 씨가 해외로 도망가면서 이 씨가 모든 죄를 김 씨에게 미뤘다”며 “이 씨가 범행에 가담한 조선족 4명을 고용하고 마약을 구입한 것 같은데 이를 밝히지 못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A 씨는 사건 현장에는 없었지만 변호사인 J 씨도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있다. A 씨는 “J 씨가 범행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는데 증거가 없어 김 씨의 진술이 꼭 필요했다”며 “전과 17범인 김 씨는 원래 나쁜 사람이지만 오랜 우정을 배신한 친구의 죄는 꼭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씨의 죽음으로 80억 원도 찾을 길이 막막해졌다. 김 씨는 A 씨에게 마약을 투약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A 씨의 부동산을 담보로 H저축은행에서 80억 원을 대출받아 자신의 통장으로 옮겼다. 김 씨가 붙잡히기 전 H은행과 대출금을 두고 소송을 벌인 A 씨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대출한 돈이라 갚을 수 없다고 했지만 법원은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며 “오랜 공방 끝에 절반만 갚기로 결정이 났지만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A 씨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말레이시아 한인회 부회장 B 씨(54)의 가족이다. A 씨는 “김 씨가 B 씨를 죽인 게 분명하다”며 “나를 살려준 김 씨가 오히려 고맙다”고 말할 정도다. 김 씨는 지난해 10월 말레이시아에서 B 씨에게 접근했다. B 씨는 김 씨를 만난 날 실종돼 아직까지 행방불명 상태다. 경찰은 B 씨가 실종 직전 김 씨와 함께 있었던 정황 등을 증거로 김 씨가 B 씨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수사해왔다.
본보 2012년 3월 22일자 A14면.말레이시아에 있는 B 씨의 친척은 1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큰딸이 직장도 관두고 아버지 행방을 찾는데 집중했는데 김 씨가 죽어 시신이라도 수습할 길이 막혔다”며 “남은 가족은 말레이시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몇 달을 매달려 수사한 사건이지만 피의자가 없으니 종결할 수밖에 없다”며 “사망처리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B 씨 가족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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