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목표는 아니었다. 거액이 투자된 남극탐사가 큰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아라온호’는 인륜과 의리를 택했다.
10월 4일 인천항을 떠나 16일 뉴질랜드에 기착해 남극 탐사를 준비하던 국내 최초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조난당한 러시아 어선을 구하기 위해 17일(현지 시간) 긴급 출항했다. 32명이 승선한 러시아 ‘스파르타호’가 뉴질랜드에서 약 2000해리(3704km) 떨어진 빙붕(氷棚·남극 주변 바다의 거대 얼음덩어리) 틈에서 좌초되며 긴급구조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스파르타호가 ‘조난 호출’을 보낸 것은 16일 오전 3시. 남극 로스 해로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실수로 최대 두께가 900m에 이르는 ‘얼음 선반’에 부딪혔다. 배는 크게 기우뚱했고, 삽시간에 갑판까지 물이 차올랐다. 위기에 직면한 선원들은 고무보트로 탈출까지 시도했다. 다행히 스파르타호는 13도 정도 기운 채 멈췄다. 뉴질랜드 공군 남극수송기 ‘허큘리스’가 9시간 만에 조난선에 추가 펌프 1개와 비상물품을 떨어뜨려줘 최악의 상황은 막았다. 현재 선원들은 모두 무사하다.
그러나 물을 퍼내느라 펌프를 모두 가동한 스파르타호는 여분 동력이 없어 자체 수리가 곤란하다. 육지로부터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기상도 급변해 수리를 위한 헬리콥터가 갈 수 없다. 결국 다른 배가 가지 않으면 구출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하지만 주위에 연락된 노르웨이와 뉴질랜드 선박 3척은 접근할 장비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 그리고 얼음을 뚫고 갈 능력을 가진 배는 오직 아라온호뿐이었다.
아라온호는 사실 이번 출항에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세종에 이은 두 번째 과학기지 ‘장보고’를 건설할 지역을 정밀 탐사해야 한다. 당초 19일 떠날 계획이었지만, 아라온호는 바로 출항을 감행했다. 현재 16노트(시속 약 30km)의 최고속력을 내고 있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8일 정도가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얼음을 깨고 가야 할 땐 시속 3노트로 속도가 떨어져 도착 일시를 예측할 수 없다. 임무 실패의 부담에도 아라온호가 곧장 구호에 나선 건 당연히 ‘인명이 우선’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김현율 선장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긴박한 상황에서 다른 걸 따질 순 없다”며 “아라온호가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아라온호로선 이번 구출은 러시아에 대한 보은의 의미도 있다. 지난해 1월 남극 탐사에 올랐던 초보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는 수십 차례 극지를 누볐던 러시아의 베테랑 쇄빙연구선 ‘아카데미크 페도로프호’가 앞에서 길안내를 맡아줘 고생을 많이 덜었다.
무엇보다 아라온호는 고(故) 전재규 세종기지 연구원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선박이다. 2003년 12월 전 씨는 동료 2명과 고무보트를 타고 연구에 나섰다가 끝내 수만리 얼음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그의 희생은 정부의 쇄빙연구선 건조 계획을 앞당기는 불씨가 됐다. 함께 보트에 탔다 구조됐던 정웅식 연구원은 “고인의 희생으로 아라온호가 만들어졌다는 걸 많은 이들이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연구원의 숭고한 희생이 빚어낸 아라온호가 이제 삶을 구하는 배가 되어 지금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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