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저세상에선 수컷과 합방하렴! 팜 파말(馬)”

첫날 밤 때 수컷 세마리 뒷발차기로 죽인 얼룩말 ‘젤러’ 숨져

남들에게는 착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세 번의 결혼으로 얻었던 남편들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모두 숨지게 했던 그녀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람 이야기는 아니다. 서울동물원은 7일 “국내 유일한 그레비얼룩말 암컷 ‘젤러’(사진)가 지난달 28일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1980년생으로 올해 31세. 얼룩말의 평균 수명이 25세인 점을 감안하면 장수한 편.

서울동물원 개원을 1년 앞둔 1983년 독일에서 건너온 젤러는 수컷들의 구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매혹적인 미모를 앞세워 이중 스파이로 활동했던 마타 하리의 본명에서 따왔다. 강렬한 ‘팜 파탈’의 매력을 뿜어내던 젤러는 ‘팜 파말(馬)’라는 별명도 얻었다. 급기야 첫 합방을 시도했던 1993년에는 젤러의 뒷발차기에 배를 강타당한 첫 남편이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채 며칠 앓다 목숨을 잃었다.

이후 1997년까지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젤러의 매력에 빠져 구애하던 다른 수컷 두 마리 역시 합방을 시도하다 뒷발차기 한 방씩을 맞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얼룩말의 뒷발차기는 사자에게도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강력하다.

서울동물원은 해외에서의 반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그레비얼룩말의 대를 잇기 위해 다른 수컷을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희생만 늘어날 뿐이라고 판단해 독수공방하게 했다.

동물원 관계자는 “젤러의 매력에 이끌려 달려들다 숨진 수컷을 보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며 “홀로 멋진 줄무늬와 갈기를 뽐내던 젤러를 볼 수 없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그레비얼룩말은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 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서 1급으로 지정된 국제적 멸종위기종이다.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