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지혜]<1>프랑스 국가공공토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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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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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 건설, 23차례 머리 맞대 ‘환경 갈등’ 없애

2009년 프랑스 국가공공토론위원회(CNDP)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나노기술 규제 관련 보고서를 보고 있는 시민들(왼쪽). 프랑스에서는 화장품과 약품에 포함된 나노입자가 토양에 스며들면 독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환경단체들의 시위가 잇따랐다. 한 시민이 토론회에서 정부의 나노기술 규제 방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오른쪽). CNDP 제공
2009년 프랑스 국가공공토론위원회(CNDP)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나노기술 규제 관련 보고서를 보고 있는 시민들(왼쪽). 프랑스에서는 화장품과 약품에 포함된 나노입자가 토양에 스며들면 독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환경단체들의 시위가 잇따랐다. 한 시민이 토론회에서 정부의 나노기술 규제 방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오른쪽). CNDP 제공
《 세종시 수정안과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이전 및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선정을 둘러싼 갈등 등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국책사업들은 대부분 극한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됐다. 압축 경제성장의 그늘로 남은 지역 간 격차에서 배태된 지역이기주의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세대 간 갈등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면서 한국의 사회갈등은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민주주의의 역사가 깊은 선진국들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사회갈등을 해결하는 체계적인 ‘갈등관리시스템’을 구축해놓고 있다. 우리도 선진국 도약을 위해서는 사회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국가적 갈등을 해결하는 ‘갈등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노력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는 사회통합위원회와 함께 프랑스, 덴마크, 영국, 미국의 선진 갈등관리 제도를 소개하고 한국사회 공존을 위한 갈등관리 방안을 모색하는 기획을 3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
2002년 12월 프랑스의 관문 샤를 드골 국제공항. 매년 6000만 명이 찾는 유럽 최대공항인 이곳에 공항 고속철도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터져 나왔다. 문화재 훼손과 소음 피해를 우려한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무산 위기에 처한 고속철도 사업이 되살아난 것은 프랑스의 갈등관리 전담 기구인 ‘국가공공토론위원회(CNDP)’ 덕분이었다. CNDP는 고속철도 건설 계획이 발표된 뒤 한 달 만인 2003년 1월 갈등 해결을 위한 개입을 결정하고 8월부터 4개월간 23번의 공공토론회를 진행했다.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 전문가와 사업 시행자가 모두 참여한 공공토론회에서는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2년 만인 2005년 초 정부는 당초 계획을 약간 수정해 고속철도 사업을 다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의견을 반영해 일부 노선에 대해서는 기존 일반철로를 개선해 사용하기로 하면서 사업에 들어가는 예산은 당초 6억6000만 유로에서 3분의 1 수준인 2억 유로 정도로 크게 낮아졌다.

1990년 6월 단군 이래 최대 역사(役事)로 불리는 경부고속철도 노선이 발표됐다. 당초 개통 목표는 1998년. 하지만 사업 초기부터 계속된 환경오염과 문화재 훼손, 지역 간 노선 유치 갈등으로 개통 시기는 계속해서 늦춰졌다. 급기야 2002년 착공한 대구와 부산을 잇는 천성산 터널공사는 지율 스님을 비롯한 종교단체와 환경단체들이 ‘공사중지 가처분신청’과 함께 3차례에 걸쳐 단식농성을 하면서 289일간 중단되기도 했다. 법원의 판결로 공사가 재개되면서 경부고속철도 대구∼부산 구간은 당초 목표보다 12년 늦은 지난해 개통됐지만 천성산 터널공사 지연에만 100억 원이 넘는 경제적 피해를 남겼다.

프랑스는 ‘68혁명’부터 최근 연금제도 개혁을 둘러싼 대규모 폭력시위까지 숱한 갈등을 겪어 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한국처럼 공공사업을 둘러싼 환경·지역 문제가 국가적인 갈등으로 떠오르는 일은 드물다. 정부 산하에 다양한 공공갈등관리기구를 두고 갈등 요소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사업 계획이 확정되기 전부터 공공토론회를 통해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은 국책사업의 추진력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대형 사업은 의무적으로 공공토론회

프랑스에는 모두 5개의 갈등관리기구가 있다. 이들은 사업 방향 수립-분쟁 가능성 검토-여론 수렴-사후 갈등 관리 등 공공사업 진행 단계별로 역할이 구분돼 있다.

1995년 설립돼 2002년 독립기구로 승격한 CNDP는 이 가운데 공공사업과 관련한 여론 수렴 기능을 맡고 있는 대표적인 갈등관리기구다. 공공사업 계획 초기에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듣는 공공토론회를 열거나 사업을 추진하는 정부 부처나 시행사에 정책 조정 권고를 내릴 수 있다.

특히 프랑스 정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철도나 도로, 발전소, 문화·체육·관광시설 건설은 의무적으로 공공토론을 열어 불만을 가질 수 있는 지역 주민이나 시민단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공토론회는 보통 사업별로 20차례가량 열리고 1000여 명이 참여한다. 공공토론회가 끝나면 주민들과 시민단체가 내놓은 의견들을 모아 보고서를 발표하고 정부 부처나 사업 시행사는 이를 검토해 후속조치를 결정한다.

샤를 드골 공항 고속철도 사업은 물론이고 2005년 차세대 원자로 건설과 방사능폐기물 관리법 제정, 2006년 바스티아 항만 개발사업 등 민감한 대형 공공사업들이 모두 공공토론회를 거쳤다.

물론 토론회에서 나온 의견을 반드시 공공사업에 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업 계획이 확정되기 전부터 여론 수렴에 나서기 때문에 공공토론회 결과가 사업계획에 반영되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2003년부터 CNDP가 공공토론회를 열었던 공공사업 37건 가운데 토론회에서 나온 건의를 받아들이거나 사업 내용을 일부 변경한 국책사업은 26건(70%)에 이른다.

○ 사업 초기 여론 수렴이 성공의 열쇠

한국에서도 대부분의 대형 공공사업은 공청회나 주민설명회 등 여론 수렴 과정을 거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가 이미 정부의 사업계획이 사실상 확정된 뒤 이뤄지는 요식행위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정대로 공공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방어에 급급한 정부와 사업을 무산시키기 위해 극렬 투쟁을 벌이는 지역 주민, 시민단체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CNDP는 공공사업 계획 초기 단계부터 공공토론회를 열어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모으기 때문에 토론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만족도가 높다. 일부 갈등이 큰 공공사업에 대해서는 강경한 이익집단이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공공토론회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사업을 반대하는 주민이나 단체 대부분이 시위보다는 토론 참여를 선택한다.

2007년 공공토론회에 참여했던 장폴 알메라스 씨는 “공공토론을 통해 공공사업 계획에 대한 정부의 설명을 충분히 들을 수 있어 좋았다”며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제도”라고 말했다.

투명한 정보공개와 철저한 중립성 유지도 CNDP가 성공적인 갈등관리기구로 자리 잡은 비결이다. CNDP는 개입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공공사업과 관련한 보고서를 공개해 토론회에 참여하는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토론회가 끝난 뒤에도 매년 한 차례씩 정부 부처나 사업시행사의 후속조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공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 산하 기구라는 이유로 나타날 수 있는 중립성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 토론회 진행 과정에서 CNDP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하고, 공공토론회 없이 정책조정 권고를 내릴 때도 중립적인 제3의 관리자를 임명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에마 르텔리에 CNDP 사무처 대외협력관은 “국책사업에 대한 오해로 갈등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급적 초기에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며 “정부로부터의 독립은 갈등관리기구로서의 신뢰성 확보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파리=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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