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노인정 소녀시대 떴다” 어르신 까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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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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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60대 ‘강남 아줌마’ 20명, 반짝이 의상 입고 6년째 공연
입소문 나며 경기-충남까지 원정

양로원 등을 돌며 6년째 공연을 펼치는 대규모 아줌마 봉사 동아리 ‘실크(실버 레크리에이션)’ 멤버들. 사진 제공 강남구
양로원 등을 돌며 6년째 공연을 펼치는 대규모 아줌마 봉사 동아리 ‘실크(실버 레크리에이션)’ 멤버들. 사진 제공 강남구
“어부바 부리 부비바… 자, 돌리고∼ 때리고∼ 섞고∼.”

29일 오후 2시. 가수 장윤정의 ‘어부바’ 노래가 흘러나온 서울 강남구 역삼동 역삼노인복지센터 4층 강당. 한마디로 ‘한여름’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70, 80대 노인들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박점분 씨(59)를 향해 열광하고 있었다. 빨간색 가발을 쓴 박 씨는 화투 속 동작들을 인용해 만든 ‘화투춤’을 선보였다. 박 씨의 공연이 끝나자 코주부 안경을 낀 ‘마술 선생’ 송계정 씨(61)가 냄비 뚜껑을 들고 등장했다. “모두 콧기름을 넣어주세요!”라며 주문을 외우자 갑자기 뚜껑에서 막대 사탕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이처럼 웃으며 사탕을 집는 노인들은 형형색색의 가발과 리본으로 치장한 10명의 아줌마들을 향해 연방 “고마워”를 외쳤다. 얼굴 주름만 없애면 아이돌 스타와 10대 팬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영하 5도의 추운 날씨도 한 방에 녹인 이들은 50, 60대 ‘강남 아줌마’ 20명으로 구성된 레크리에이션 봉사 그룹 ‘실크(실버 레크리에이션)’ 멤버들이었다.

○ 6년째 전국 누비는 ‘아줌마시대’의 연말

공연이 끝나고 이들과 마주했다. 사는 곳은 대부분 압구정동, 논현동, 삼성동 등 소위 ‘8학군’ 지역. “밍크코트 입고 우아하게 차 마실 강남 아줌마들이 왜…”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공남규 씨(57)가 “어휴, 우린 달라요!”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들이 밍크코트 대신 ‘반짝이’ 의상을 입은 지는 올해로 6년째. 시작은 2004년 1월 강남능력여성개발센터에서 열린 구민 대상 프로그램 ‘실버 레크리에이션’이었다.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센터를 찾은 실크 회장 임호옥 씨(61)와 권분례 씨(55) 등 초창기 멤버들은 이곳에서 각종 율동과 춤을 배웠다. 6개월을 배우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자연스레 “배운 것들을 써먹어 보자”며 양로원, 노인복지관 등을 돌면서 무료 공연을 했다. 이후 “함께 하자”며 멤버들도 늘었다.

“처음에는 무표정한 어르신들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래서 호응 없을까 봐 1시간 공연에 코너 50개 정도 준비해 갔죠.”(권 씨)

율동과 춤, 개인기로도 부족해 멤버들은 개인적으로 마술, 전통무용, 웃음치료를 배우기도 했다. 최대한 싼 밥을 먹으며 아낀 돈으로는 가발과 안경 등 소품을 샀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니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활동 영역은 강남구를 넘어 경기, 충남까지 뻗었다.

○ 10년 후 우리의 모습일 수도

대규모 인원으로 봉사 활동을 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인정의 소녀시대’라는 애칭도 얻었다. 하지만 정작 가족들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가 노인인데 누굴 돌보냐”는 자녀, “집이나 지키라”는 남편…. 하지만 진심은 통했다. 임 씨는 “처음엔 반대하던 아들도 이제는 ‘어머니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전했다.

이들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봉사 활동을 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미자 씨(57)는 “마른 북어처럼 무기력한 인생 선배들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환갑의 문턱에 서 있는 이들은 모두 “남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10년 전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우울증에 걸렸다는 이임순 씨(62)는 “남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내가 언제 우울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내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런 이들에게 가장 보람된 순간이 언제냐고 물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돌아왔다.

“얼마 전 저희 공연을 보신 어르신께서 다 부스러진 초코파이 하나를 제게 주셨어요. 너무 부스러져 먹기조차 힘들 정도였죠. 하지만 그 어르신은 저희 때문에 즐거웠다며 ‘내가 가진 전부’를 주고 싶다 하셨죠. 가장 보람된 순간은 바로 그럴 때 아닐까요?”(임 씨)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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