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끼리 가르치고 스스로 평가… “공부가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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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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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기반 교육과정 도입한
뉴질랜드 교육현장을 가다

《과거에는 교육의 목표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창의력’ ‘자기주도 학습능력’ 등이 교육과정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과정 개정 작업의 핵심도 학습 부담을 줄이고 창의력을 기르는 것이다. ‘역량기반 교육과정(Competence based curriculum)’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역량기반 교육과정은 국어 영어 수학 등 교과목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것에서 벗어나 ‘창의력’과 ‘자립심’ 등의 핵심역량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재편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하다. 동아일보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KICE)과 함께 역량기반 교육과정을 선도하고 있는 국가를 찾아 역량기반 교육의 생생한 현장을 들여다봤다.》

한 수업시간에 여러그룹 나눠 공부
교사 “자립심-타인과 교류 가르쳐”
등수 대신 자신의 목표치 평가하게
“교사의 변화의지가 교육성패 좌우”



○ 그룹별로, 친구끼리 가르쳐주는 수업

지난달 21일 뉴질랜드 웰링턴 시 카로리초등학교. 20반 교실에서는 수학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5, 6학년이 섞인 학생 30여 명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같은 교실, 같은 수업 시간이었지만 학생들은 그룹별로 다른 수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담임인 에리카 리겟 교사가 입을 열었다. “메이시, 오늘 네 역할은 친구들에게 눈꽃송이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거야”라며 첫 번째 그룹의 리더를 지정했다. 아이들이 몰려들자 6학년 메이시 양은 교과서를 보며 능숙하게 색종이를 반으로 접고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종이를 펴니 좌우대칭의 눈꽃 모양 도형이 나타났다. 메이시 양은 학습부진아인 샬롯 양에게는 설명을 여러 번 반복했다. 같은 시간 다른 한 그룹은 정육면체를 그리며 도형 공부를 하고 있었다. 또 다른 그룹은 리겟 교사에게 나눗셈을 배우고 있었다.

카로리초등학교는 2005년 뉴질랜드 교육연구센터가 지정한 핵심역량 교과과정 시범학교다. 리겟 교사는 “뉴질랜드 초등학교에서는 원래 3, 4학년과 5, 6학년은 같은 학년군으로 묶어 수업을 같이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수업 시간에 그룹으로 나눠 친구들끼리 가르쳐주며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은 핵심역량 교과과정을 도입한 후 생긴 가장 큰 변화다. 장애아나 학습부진아도 한 교실에서 공부한다. 리겟 교사는 “더는 교사가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지 않는다”며 “학생들 스스로 사고하고, 자립심도 기르고, 다른 사람과 어떻게 교류하는지 배우는 게 우리가 강조하는 핵심역량”이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수업 때마다 어떤 핵심역량이 필요한지 이야기한다. 학기 초 학생들은 각각의 핵심역량을 자기만의 언어로 정리한다. 20반 교실에는 ‘자립심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 ‘참여는 수업 시간에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교실에서 친구들을 돕는 것’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다. 학부모들과도 이 내용을 공유한 뒤 학급 조약으로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핵심역량은 꼭 지켜야 할 ‘책임’이 된다.

○ 성공 요인은 교사의 변화 의지

뉴질랜드는 ‘스스로 지식과 기술을 터득할 수 있는 21세기형 인재를 만든다’는 목표 아래 2005년 △사고력 △언어 구사 능력 △자립심 △대인관계 △참여와 협력이라는 5가지 핵심역량을 교과과정에 도입했다.

역량을 쌓는 과정을 중시함에 따라 평가 방법도 달라졌다. 아는지 모르는지를 측정하는 시험을 보거나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 그 대신 학생이 자신의 목표 도달치를 스스로 평가하게 한다. 6학년 학생이 “저는 10까지 최소공배수를 말할 수 있고, 20까지 소수를 꼽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 담임교사가 “이것은 6학년 수학 교과과정의 4/5단계를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학년 기대치보다 잘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적는 식이다. 한 학기가 끝나면 학생이 교사와 학부모 앞에서 성취도를 직접 말하는 시간도 있다.

이 학교 다이앤 리겟 교장은 “내용 중심에서 핵심역량 중심으로 교과과정이 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의 변화 의지”라고 말했다. 배우는 과정을 중시하는 특성상 수업 준비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겟 교장은 “1년에 두 번 ‘교사 발전의 날’로 정해서 서로 수업 방식도 보고 수업 자료도 공유한다”며 “매일 20분씩 차를 마시며 학생이나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만큼 모두 변화의 필요성을 공감한다”며 “핵심역량 교과과정 도입 후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길러 공부를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 대학 진학률도 올라

초등학교와 달리 대입 자격을 얻기 위한 국가 자격증인 학업 성취도 국가 수료증(NCEA) 대비를 해야 하는 고등학교는 핵심역량 교육과정 도입이 쉽지 않다. 시험에 대비해 지식을 전달하는 기존 수업 방식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웰링턴 시 웰링턴여자고등학교는 2007년 교과과정에 핵심역량을 도입했다. 앤 코스터 교감은 “21세기에는 배울 것이 나날이 새롭고 많아지는 만큼 학생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라면서 “곧 실패할 거라고 할 정도로 과감한 개혁이었다”고 말했다.

웰링턴여고는 특히 수업 외 영역에서 핵심역량을 구현하는 방법에 집중했다. 학생들이 졸업 후 다양한 사회 환경 속에서 리더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컴퓨터에 능숙한 학생들이 모여 만든 ‘테크에인절스(Tech Angels)’가 대표적이다. 테크에인절스의 학생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른 학생과 교사까지 가르친다. 리더인 주디 양은 “공부와 병행하는 게 힘들지만 자기 절제와 의사결정,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 그룹은 지난해 한 기업에서 1500달러를 후원받았으며 다른 학교에서도 방법을 배우려고 하는 등 성공 모델이 됐다. 앤 교감은 “대학도 공부만 잘하는 조용한 학생보다 주디 같은 학생을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심역량 교과과정을 처음 도입한 후 학생들의 성취도 평가 결과는 오히려 더 좋아졌다. 코스터 교감은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길러서인지 여느 고교와 달리 대학 진학률도 90%나 된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교육연구센터의 샐리 보이드 박사는 “핵심역량 교과과정 도입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라고 강조했다. 그는 “교사들이 한번에 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핵심역량 교과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이라고 덧붙였다.

교육연구센터는 교사 스스로 핵심역량 교과과정을 이끌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개설해 교사들이 연구자료나 보고서, 관련 교육전문가를 찾아볼 수 있게 한다. 또 수업을 잘하는 교사를 채용해 다른 교사들이 조언을 구하고 연수받을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웰링턴=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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