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선감원 …‘어린이 정신근로대’ 원혼 달랬으면”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7일 03시 00분


일제 8∼18세 남자아이 일본군인 만들려 가혹행위
당시 교관아들 이하라씨 방한 고발… “위령비 추진”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가 한국인 남자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일본 군인으로 키우기 위해 경기 안산시 선감도에 설치한 ‘선감원’의 소년들이 일본인 교관의 지시에 따라 김장을 담그고 있다. 사진 제공 안산시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가 한국인 남자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일본 군인으로 키우기 위해 경기 안산시 선감도에 설치한 ‘선감원’의 소년들이 일본인 교관의 지시에 따라 김장을 담그고 있다. 사진 제공 안산시
1944년 여름 경기 안산시 앞바다의 작은 섬인 선감도(안산시 단원구 대부동·현재는 내륙과 다리로 연결)의 한 민가 마당. 일본인 교관이 끈으로 손이 묶인 채 쓰러져 있는 15세 남짓한 조선인 소년을 몽둥이로 마구 내리쳤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소년은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해내다 결국 숨이 끊어졌다.

소년은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8∼18세 조선인 남자 아이들을 일본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1943년 선감도에 설치한 ‘선감원’에 수용돼 있었다. 그곳에서 도망치려다 붙잡혀 참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다른 일본인 교관의 아들이었던 9세 소년 이하라 히로미쓰(井原宏光·사진)는 그 장면을 담장 옆에서 목격했다.

이제 75세의 노인이 된 이하라 씨가 일제강점기 ‘어린이 정신근로대’인 선감원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26일 한국을 찾았다. 그는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 주최로 27일 국회에서 열리는 선감원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증언할 예정이다.

이하라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어디선가 선감원으로 끌려온 150명가량의 아이들은 오전에 일본어 교육과 군사훈련을 받고 오후에는 농사 등에 동원돼 일하다 병들어 죽곤 했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이하라 씨가 선감원 소년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부모님 몰래 찾아간 격리병동에서 잊고 싶도록 끔찍한 모습들을 보게 됐다. 그는 “앙상한 몸의 곪은 피부 위로 파리들이 꼬여 퍼렇게 멍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년들은 파리 쫓을 힘도 없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고 회상했다. 엎드려 있던 한 아이는 엉덩이에 살이 없어 항문이 그대로 보일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 소년 이하라가 시신을 본 것은 마당에서 맞아 죽은 소년뿐이었지만 동네에서는 죽은 아이들을 위한 상두꾼의 곡소리가 자주 들렸다. 형식적으로나마 장례식을 치러줬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교우들은 나를 ‘귀환동포’라며 따돌렸어.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친구들에게 이유 없이 심하게 맞았지. 그때 문뜩 피 흘리고 쓰러져 있던 선감원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선감원의 비극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구상했지.”

그는 1980년부터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 선감도를 찾아가 과거를 더듬었다. 그렇게 해서 1989년 논픽션 소설 ‘아! 선감도’를 출간했다.

이하라 씨는 “사실 선감도에서 살던 시절 동네 아이들과 썰매타기 등을 하며 재밌게 놀았다”며 “내겐 즐거운 그곳이 어떤 이들에겐 고통의 현장이었다는 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일 양국이 함께 위령비를 세워 그들의 원혼을 달래줬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위령비 건립 추진 구상에 대해 설명했다.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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